[인터뷰] '유아독존, 모든 족쇄를 끊고 오직 네가 되라' 다큐멘터리 감독 경순

<레드마리아> 감독, 영화제작사‘ 빨간 눈사람’의 공동 창립자,‘ 빨간 경순’은 경순 감독의 별칭이다. 빨간색은 불온하고, 강렬함의 상징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경순 감독. 지난해 개봉된 <레드마리아>는 ‘여성의 모든 노동은 배에서부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를 위해 3년 동안 필리핀, 일본, 한국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의 배만 찍었다. 마리아나 신사임당으로 상징되는 고결한 여성의 이미지를 비틀어보기 위해 빨간색을 입혔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경순 감독을 만났다.
 

경순감독은 이상화된 가족을 강요하는 사회를 <쇼킹패밀리>에서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에도 가부장제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담겨있다. 가족이라는 제도도 울타리가 아니라 여성을 묶어두는 족쇄라는 경순 감독. 그녀는 여성을 묶어두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경순 감독이‘ 여성’에 대한다큐만 만든 것은 아니다. 강정마을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을 다룬 <Jam Docu 강정>,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전국유가족협의회의 투쟁을 다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민들레>, 민족주의가 강조되는 사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애국자 게임> 등 그녀는 세상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페미니스트 중에서 조한혜정과 같이 양성을 쓰는 사람은 많은 데, 이름만 쓰는 사람은 드물다
-2005년 <쇼킹패밀리>를 제작할 때 호주제 폐지 운동이 대두했다. 이를 반영해 영화제작 팀에서 부모 성을 모두 쓰자는 논의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부모 성이 모두 이 씨다. 굳이 표기를 하면 이이경순이 된다. 하지만 부모 성을 모두 쓰는 것도 혈연의 느낌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부각시키려면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나, 독립된 나로 불려지기를 바랐다.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지만 불리고 싶은 게 자기 이름이어야 한다. 그래서 경순이라는 이름을 쓴다. 비슷한 맥락에서 <쇼킹패밀리>와 <레드마리아>에 등장하는 여성들 모두 성 없이 이름만 표기했다.

△<레드마리아>에 이츠무라라는 노숙자가 등장한다. 그를 통해서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나?
-이츠무라는 일본의 유유키 공원에서 혼자 텐트를 치고 살고 있다. 한 때는 직장을 다녔지만, 현재는 노숙하는 젊은 여성이다. 음식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먹으며, 버려진 옷들을 입는다. 이츠무라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물질적 혜택과 가부장제가 제공하는 안락함도 거부했다. 그 뒤 그녀는 굉장히 자유로워졌다. 이츠무라는 불필요한 노동으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쓴다. 영화 보면 알겠지만 이 친구가 진짜 바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하지 않은 사람은 능력이 없거나, 낙오된 걸로 간주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낙인을 찍는 것이다. 이츠무라처럼 사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삶의 원천처럼 생각하는 노동에 대해 성찰을 해봐야 한다. 노동은 임금을 받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다.

△<레드마리아>에는 전업주부와 직업적으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이 함께 등장한다. 이는 어떤 의도가 담겼나?
-<세계화의 하녀들>이라는 책에서도 알 수 있듯 세계화 이후 가사노동과 관련된 직업이 늘어났다. 이에 여성이 주로 담당하던 돌봄서비스는 또 다른 여성들로 대체됐다. 우리나라도 1997년부터 간병인이 직업으로 안착되기 시작했지만 대우나 임금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다. 돌봄 서비스가 노동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낮다. 같은 노동을 하는 두 사람을 비교하며, 한 사람은 임금을 받고 또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레드마리아>에서 상반된 여성의 입장을 비교하는 구도를 자주 연출했다. 특히 성노동자와 위안부를 함께 연출해 신선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 영화 <레드마리아> 속 한 장면 (취재원 제공)

-여성의 문제는 윤리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성노동자와 위안부를 강제성의 여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옳지않다. 강제성의 여부 역시 모호할 분더러, 이를 구분하는 잣대는 2차 가해를 낳는다. 2차 가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양쪽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여성들과 몸을 끊임없이 연관짓는다. 남자한테‘ 걸레’라는 말을 잘안 쓰지만, 여자한테는‘ 걸레’라는 말을 잘 쓴다. 순결을 잃으면 몸을 욕되게 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비난한다.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우리는 성을 상품화하고 이를 소비한다. 성노동에 대해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

영화를 보고‘ 산만하고 무엇을 말하는 지 모르겠다’ 평과‘ 기가막힌 편집과 의도’라는 평이 있었다. 모험이기도 했지만, 여성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 택했다.
 

△<쇼킹패밀리>를 통해 가부장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쇼킹한 가족은 무엇인가?
-미디어를 통해서 이상화된 가족은 그런 형태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 큰 절망감을 안겨준다. 부모님이 내가 어렸을 때 이혼해서 우리 집은‘ 정상적인 가족’은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통해 가족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을 깨고 싶었다. 현재 미디어 속에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등장하지만 <쇼킹패밀리>가 개봉했던 2005년에는 낯설었다.

사람들은 안정된‘ 4인 가족의 신화’에 목을 맨다. 가족의 틀을 강요하는 사회 자체도 쇼킹하지만 필사적으로 그런 틀 속에 맞추려는 사람들의 모습도 비판하고 싶었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가족이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하기 위해 사회는 가족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가족은 사람이 살면서 맺을 수 있는 관계 중 하나이고, 태어났을 때부터 생겨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당신의 작품을 보면 국가나 사회구조 속 억압받는 개인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무엇인가?
-오늘날 다양성이라는 말이 많이 소비되지만 개인들은 여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개인 존중주의’다.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다. 내가 존중받아야 남을 존중할 수 있다.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나 가족과 같은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그러한 생각을 최대한 작품에 담았다. 인간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데 사회적인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다. 개인이 존중되는 풍토가 형성되면 사회적인 구조 역시도 많이 바뀌게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기로 어떻게 결심하게 됐나?
-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노동운동을 하면서 지하철노조 간사로 활동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때 문화 예술 단체에서 공연 기획을 하다가 그만두게 됐다. 노동 운동이 갖고 있는 대의가 크지만 관습화된 노동운동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투쟁하는 개인을 간과한다. 같은 주제라도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으로 얘기해 보고 싶었다.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언어다. 대의 속에 있는 세세한 결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영화가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형식으로 풀어낼 수 있지만, 내 목소리를 가장 잘 대변하는 건 다큐멘터리였다.

독립영화를 찍기 위해 치킨집에서 일하거나 워드 대필도 했었고, <민들레>를 찍을 때는 밤잠 설쳐가며 신문 배달도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지만 영화를 찍는 순간만큼은 즐거웠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통해 즐거움을 맛보던 그 시절도 이제는 끝이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제작비를 감당하기에는 물가가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획서를 잘 써서 제작 지원을 받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작품 활동은 어떻게 할 예정인가?
-이번에는 케이티의 50대 남성 노동자로 눈을 돌렸다. 페미니즘 운동이 트랜스젠더, 동성애자와 분리됐다는 생각이나, 남성의 권리와는 상반된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성불평등으로 인한 피해는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에서 남성으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눈을 돌린 거다. 정규직이면 삶이 안정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규직의 삶도 명예 퇴직이나 희망 퇴직을 강요당하는 등 불안하다.

△부대신문 인물면의 공통질문이다. 당신의 20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20대부터 지금까지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희생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 사람은 미래가 현실이 되도 또 다시 미래를 위해 현재를 보내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을 포기하지 말고,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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