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자격으로 2,000페이지도 넘는 책을 읽고 매주 시험을 보고 과제를 내라고 요구할 수 있나? 전공필수라 도망갈 수도 없는데, 우리과 학생들은 내 수업의 부담 때문에 다른 수업에서 제대로 성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숙제를 줄여야 하나? 개강한 지 두 주가 지났건만 필자는 아직도 이 생각으로 번민하고 있다. 심지어 자면서도 이 고민을 할 때가 있다. 학생들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C학점을 줄 수밖에 없는, 상대평가제 하의 교수로서의 무력감 때문에. 비열한 의자 뺏기 게임 속으로 내 학생들을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교수로서의 자괴감 때문에. 최근에는 상대평가제도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폭발 지경에 이르러 교과부나 대학본부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필자는, 상대평가가 대학을 시장화하는 폭력적이고 비교육적인 제도이자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는 제도고,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하는 제도이므로 즉각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평가제도는 사물의 가치를 교환가치로 획일화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질서를 구현한 평가방식이며 근본적으로 비교육적이다. 교육이란 피교육자가 사물과 세계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이끄는 행위다. 지식획득도 그것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교육은 피교육자의 고유성과 절대성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하며, 교육에서의 성취도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평가될 수 없다. 소위 선진국 중 어떤 나라도, 자유경쟁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미국조차 대학에서 학점을 상대평가로 부여하지 않는다. 경쟁이라는 시장의 원리를 교육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만 시장의 원리를 가져와 대학교육을 망쳐야 하는가? 
 
상대평가를 하면 학생들이 더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경쟁하게 되니 학업성취도가 향상되고 교육의 질이 높아지리라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어차피 누군가에게는 나쁜 성적을 부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오히려 수강생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면 곤란하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열심히 공부해봐야 여차하면 C를 받을 수도 있고, 또 C라는 낙인을 받으면 재수강해 학점을 정정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많이 읽고 생각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수업은 피해 가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학생들의 권리,‘ 수업권’이 근원적으로 부정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기를, 우리 대학의 교육의 질이 향상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학생들을 졸업장 구매자로 전락시키지 말자. 학생들을 수업권의 주체가 되도록 교육하고, 그 주체 스스로가 수준 높고 심도깊은 강의를 요구하게 하자. 그리고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할 대학과 교수의 의무에 대해 고민하자.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 대학을 대학답게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현실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으신가? 함부로 현실을 들먹이지 마시라. 바로 하나의 철학의 산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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