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임금을 모시고 임진왜란을 치른 류성용은 전란이 끝난 후 고향에서 수년에 걸쳐 징비록을 집필했다‘. 내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이 없도록 삼간다’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인 바, 그 집필 의도는 국정 최고의 위치에서도 위민정치를 구현하지 못한 자신을 뉘우치려는데 있었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선조의 실정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겨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고자 하는 의도와 더불어,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경계와 대비를 촉구하려는 속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류성용은 학문으로나 품성으로나 단연 민족의 지도자였다.

지금 우리 대학은 아마 임진왜란 같은 사상초유의 환란을 겪고 있다. 효원문화회관사태와 관련하여 전임 총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당했으니 말이다. 당사자나 측근들이 진정 청백리의 정신을 알기라도 했다면 이런 일이 학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가당키라도 했겠는가. 전란소식을 듣고 하직 인사하는 류성용에게 어머니는‘ 정승은 이미 나라 몸이거늘 가솔을 돌 볼 것이 아니라 주상을 모시고 국사를 돌보라’고 일렀다. 환란의 시대에 대학의 주요 보직자들이 학교발전을 위해 심신을 바칠 생각이 있었다면 거짓과 위선에다 부당하고 현실성 없는 상업시설을 교내에 들여 놓는 제안에 동의하여 추진했겠는가.
 
선조는 한양에 남아 왜군을 막아야함에도 쉽게 포기하더니, 전란의 승패가 달린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 평양을 버리기로 대신들과 합의하고도 백성들에게는 평양성을 사수하라고 명하였고, 대신들조차도 이를 지키라고 재촉하였으니, 백성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임금에 속고 대신에 속은 평양 민심이 소요를 일으킨 것이다. 우리의 총장과 그 측근들이 어쩜 그리도 임진왜란 당시의 조정의 모습과 흡사했던가 싶다. 
 
전란 중 동래성을 버리고 달아났던 이각과 한강을 버리고 도망갔던 신각은 모두 임진강에서 처형됐다. 희대의 ‘효원굿플러스’를 계약하고 인가해서 건설하고 분양하기까지, 모든 해괴망측한 과정에 개입한 당사자들에 대한 평가와 후속조치는 분명 우리 스스로의 책무이거늘, 우리는 왜 직무유기를 즐기고 있는가. 신상필벌과 사필귀정의 문화가 우리에겐 먼 과거의 일인가. 우리 대학을 이대로 공과도 묻지 않는 엉망진창의 구덩이에 방치하는 것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상아탑의 정서이던가.
 
제자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경제’‘ 국방’‘ 백성의 신뢰’라고 답했다. 공자는 셋 중 하나를 뺀다면 국방이요, 하나를 더 뺀다면 경제라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의 핵심요소가‘ 구성원의 신뢰’다. 신뢰는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거짓부렁으로 일관했던 학내의 효원문화회관사업의 추진 주체들은 정치·행정의 기본도 몰랐던 것일까. 구성원들이 기만당했던 작금의 환란에 이어, 또다시 더해지는 효원인의 분노와 상처는 누가 치유해 줄 것인가. 이제 우리에겐 그 어떤 청백리가 있어 우리 효원문화회관사태의 징비록을 쓸 것인가. 우리 모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스스로의 징비록을 쓰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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