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위를 구르는 색색 단풍잎 속에서 문득 이곳이 고생대의 숲이었음을 기억해낸다. 우리의 삶은 과거 선택들이 적층된 서로 다른 무한대의 겹으로 중첩되어 있다. 빛과 물질이 ‘입자면서 동시에 파동’임을 입증한 양자역학의 개념처럼 말이다. 한 장면에 무수한 풍경들이 공존하고 동시에 여러 가능성이 작동한다. 몸 안의 DNA가 가진 무수한 시공의 겹, 그것이 생명의 결이다.

모든 사건은 기실 무한한 적층을 이루며 도도히 흘러간다. 동시에 존재하며 부재하는 시간과 공간, 그 속에 굽이치며 방향과 깊이를 만드는 물결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른다. 무위와 유위, 실재와 환(幻)의 겹을 타고 흐르는 모든 삶은 우주의 겹을 생성하는 중이다. 생명을 감지하는, 그 광대하고도 미세한 감수성과 상상력은 우리 내면 어딘가에서 반짝이고 있으리라.

중요한 것은 ‘믿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방식도 믿음에 있다. 믿는다는 것은 깊이를 이해하는, 동시에 넓이를 깨닫는 방식이기도 하다. 믿음이 필요한 부분은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 뭔가 계량화·규격화되지 않는 세계를 믿는 것이 우리를 생명다운 생명으로 만든다. 정말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항상 욕망과 가치라는 두 개의 선택 속에서 갈등한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보이지 않은 것을 믿는 것, 이를 비전이라고 부르고 이상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는 현실 법칙에 끌려 급급할수록 그 기능성과 도구성은 우리를 억압한다. 현실을 바꾸는 것은 비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 그 이상이 현실을 바꾼다. 하지만 요즘은 고결한 이상이 사라진 시대, 자본으로 대변되는 현실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 결과 시대는 불신과 불안으로 술렁인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 보니 보험을 믿는다. 다양한 종류의 보험만이 우리의 미래가 되었다.

믿는다는 것은 숭고한 선택이며 실천이다. 책임을 감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믿는 일은 당장의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일이 아니다. 손해와 이익의 뒷면을 읽어내는 건 새로운 눈도, 위기 속 지구를 구하는 방식도 위대한 이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 삶이, 우리 우주가, 미세한 모든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겹으로 되어 있고, 그 틈을 타고 흐르는 것이 생명이다. 내 발등이 아니라, 타자의 발 앞을 깊이 응시해야 할 이유이다.

가치 있는 일을 믿고, 이웃의 눈빛을 믿는 힘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영악한 시대를 뛰어넘어, 당장의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힘. 문명이 곱셈과 덧셈으로 일관해 왔다면 이제 뺄셈과 나눗셈이 중요하고, 이는 ‘믿는’ 능력에서 나온다. 믿음은 인간이 생명적 존재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시도인 셈이다.

신인류의 시대, 온갖 반려 존재와 기계 그리고 AI와 공생해야 하는 환경이다. 이제 ‘인간적’이란 언어는 왠지 어색하다. 인간이 중심이 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다만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 주변은 정신을 물질로 바꾸기에 여념이 없다. 자기 중심도, 인간 중심도 아닌 우주의 삶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지독한 싸움 속에 있는 것일까. 우리 안의 깊은 생명성을 믿을 일이다.

김수우 작가(백년어서원 대표)
김수우 작가(백년어서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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