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노동문제라는 유령이. 우리나라에서 노동문제는 도통 사람 손에 잡히지 않는 모양이어서 유령과 같다. 매일 노동 일상에서 사고와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지만 제대로 된 해결책은 전무하다.

지난 11월 5일과 7일 노동자들이 아무 의미 없이 숨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한국철도공사 직원이 무리하게 2인 1조로 작업하다 화물열차에 깔렸고, 광주시의 노동자가 1.8t의 철제 코일에 깔렸다. 이틀 간격으로 일어난 이 두 참사의 피해자들은 각각 33세, 24세였다. 자본가가 안전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을 청년이었을 터였다. 살기 위해 시작한 노동이었을 테지만, 그 노동은 매일 죽음을 감수해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일하다 죽는’ 노동 문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새롭거나 충격적인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TV에서 노동 사고와 관련한 소식이 보도될 때마다 안타깝다는 생각에 앞서 ‘또야?’ 하는 한탄부터 터져 나온다. 노동 문제는 개선되기는커녕 현상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서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 지난 11월 6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사망한 노동자의 수는 510명에 달한다. 작년 동 기간의 502명보다 많은 수치다. 올해 초부터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더 늘었다.

의미 없이 죽어 가는 노동자를 위해 마련된 ‘중대재해처벌법’은 법전에 쓰인 딱딱한 문자 이상이 되지 못했고, 추상의 벽을 뚫고 현실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법률에 명시된 책임 주체인 ‘경영책임자’의 의미가 모호하고, 중소사업장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예외가 허용됐다. 실질적인 노동자의 안전 보장이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편법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등 구멍이 많은 탓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된 사건 중, 사측에 분명한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류상 안전보건관리 체계가 갖춰졌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경우도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그렇게 말만 남은 공허한 법이 됐다.

심지어 대통령마저 법의 공허함에 힘을 실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중대재해처벌법에 ‘경영 의지를 위축시키는 강한 메시지를 주는 법’이라고 말하며 경영자의 책임을 경감시키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 있다. 지독한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법이 제 역할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이 경영 의지의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경영자에 대한 전방위적 타도라든가 공산주의 지상낙원 도래 같은 것이 아니다. 다만 노동자의 ‘살 권리’일 뿐이다. 살 권리란 자본가의 무관심에 노동자의 노동이 죽음이라는 무의미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이며, 우리 사회의 바퀴가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피·땀·눈물을 연료로 굴러가는 것에 대한 거부이다.

살 권리는 자본가의 경영 의지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잃어야 하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관계가 아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오히려 대통령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더욱 강력하고 실효성 있게 개정돼야 한다. 일하다 죽는 노동을 방치하는 경영 의지는 차라리 위축되고 없어지는 것이 낫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우리 사회가 응당 보장해야 할 살 권리와 다름없다.

19세기, 비인간적 자본주의가 한창 꽃을 피우던 시절에 ‘아동 착취’는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의 우리가 그 시절 자본가에게 아동 착취를 멈추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동 노동을 금지한다면 세상 어떤 사업가가 사업할 마음이 생기겠나?”라는 어불성설이 돌아올 것이 뻔하다. 21세기인 지금, 아동 노동을 ‘일하다 죽는 노동’으로 바꿔 보라. 그 말이 얼마나 어불성설, 만불성설인지 알 것이다.

김재윤 기자
취재팀 김재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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