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그 유명한 586세대다. 그런데 이 586(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이라는 이라는 말에는 차별이 내재해 있다. 이 단어에는 학번이라는 학력 차별적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586’이라는 말에서 배제된다.

그런데 자칭 타칭 민주화 세대로 불리는, 이 차별적 단어의 주인공인 ‘586세대’가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스스로를 양심세력으로 규정한 이들이 ‘학력차별’을 조장하고, 학력차별을 당연시하고, 학력차별을 위장하고 있다. 대학서열화의 첨단에 586이 있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서 학력차별을 구조화시키는 입시교육의 최전선에 586이라는 부모 세대가 있다. 사교육 시장을 키운 것도 586이며, 경쟁적 입시제도를 강화한 것도 586이다.

흙수저와 금수저는 자연발생적 사태가 아니다. 대학 서열은 자연선택적, 적자생존의 자연 현상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작금의 사회구조가, 작금의 차별적 사회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입시제도가 만들어 놓은 인위적 줄세우기일 뿐이다. 각개약진, 각자도생을 내면화시킨 분열적 교육제도의 결과일 뿐이다.

80년대 중반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필자는 반에서 꼴찌를 하는 친구에게 “니는 공무원 시험이나 쳐라.”는 말을 했다가 “이 **놈아, 사람 무시하나?” 하는 욕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엔 공무원 시험이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비록 반에서 꼴찌를 하더라도 ‘공무원이라는 안정적 직업’보다는 좀 더 진취적인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엔 고졸 출신의 공무원들이 아주 많았다. (공무원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힌다.)

필자가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는 까닭은 당시가 좋은 시절이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왜 군사독재 시절보다 민주화된 작금의 사회에서 경쟁이 격화됐는가를 말하기 위해서다. 왜 민주주의가 더욱 격한 경쟁적 삶을 강요하는가? 왜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고 강남에서만 용이 나오는가? 왜 이런 지역 차별적 사태가 지속되는가? 왜 함께 어울려 놀아야 할 친구들이 경쟁자로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왜 살기가 팍팍해져만 가는가?

필자는 모든 시험은 뽑는 게 아니라 솎아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공정한 뽑기가 아니라 불공정한, 공정을 가장한 솎아내기에 있다고 생각는다. 시험을 통해 솎아냄으로써 기득권을 지금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있다고 생각는다. 자기계발, 스펙쌓기, 각자도생, 각개약진, 공정한 경쟁을 내면화시켜 경쟁적 삶 자체를 자연발생적 일인 것처럼,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586은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답은 ‘586’에 없다. 입시교육의 결과인 청년, 586의 자식인 당신들에게 있다. 이 경쟁적 체제를 의심하는 사람에게 있다. 586이라는 고인 물을 넘어가시라. 586이라는 굳은 땅을 밟고 가시라.

황경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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