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동지의 구별이 정치”라고 말했던것은 나치의 계관법학자 칼 슈미트였다. 끔찍한 독재자를 위해 일했던 그가 오히려 ‘급진적인 저자’로 탈바꿈하여 조망받는 것은 국가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관론’ 때문일 것이다.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상호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주요한 양분으로 삼아 존속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 범주를 통해서 편 가르기를 할 것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었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분열을 야기하여 보다 수월한 통제를 꾀하려는 지배의 논리이자 통치술이라는 언설이 그를 ‘복권’시켰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정치와 언론은 쉴 새 없이 분열의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인터넷에는 ‘동지’가 아닌 ‘적’을 향한 맹렬한 적개심과 맹목적 혐오의 글줄이 넘쳐난다. 애초 국제정치에 관한것이었던 이 비관적 인식이 비극적으로 펼쳐지는 형국이다.

이편, 저편을 가르고 통합할 국민과 탄압할 대상 사이를 오가던 이 ‘적대의 정치학’이 또 하나를 추가했으니 그 ‘적’은 전교조였고, 그에 대한 증오를 여러 차례 가장 거세게 내보인 이는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었다. 8년 전, 사학법 개정 반대 집회에서 “한 마리 해충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일 수 있고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다”고 말했을 때는 여당 대표 신분이었고, TV토론에서 “이념 교육으로 학교 현장을 혼란에 빠트리는 전교조와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냐”고 물었을 때는 대통령 후보 시절이었다. 근래 이 정권이 전교조로 인해 불편했던 일이 없었음에도, 14년 동안 합법의 영역에 있던 단체를 법외의 영역으로 끌어 내린 것은 이미 내정된 수순이었던 셈이다. 전교조 법외노조화 소식에 여의도 안팎은 거듭 전장이 되었고, 인터넷엔 ‘적’을 겨눈 댓글들이 총탄처럼 빗발쳤다.

정부가 내세운 법외노조화의 이유는 그 ‘오래된 증오’에 비하자면 빈약하고 허술하다. 위헌 소지가 많은 데다 법률적 근거가 희박한 시행령이라는 점과 거의  든 노조가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인정한 규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다. 무엇보다 9명의 해직자를 조합에서 내쫓으면 합법적 지위를유지시켜 주겠다는 조건은 기막힐 따름이다. 내 편엔 상을 반대편엔 벌을 주겠노라, 이미 도려낸 ‘대상’에 분열과 반목 대립을 거듭 주문하는 이 정부의 지난 대선 시절 캐치프레이즈가 ‘국민대통합’이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 낼 따름이다.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쪽을 박멸해야 할 ‘해충’쯤으로 여기는 정부를 뒀다는 사실은 암담하다. 다름을 인정하고 거기서 출발하여 더디더라도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 그 비용을 기꺼이 치르자는 제도가 민주주의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한 절차를 무시한 채 실체도 모호한 ‘적’들을 만들어내며 싸움을 부추기는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영호남이라는 적대적 지역주의를 ‘개발’하고 거기에 편승하여 기득권을 누리면서, ‘주적’과 ‘이적’을 들이대며 수시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정략적 우세를 점했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적과 동지’의 프레임에 갇히는 한 우리는 무차별적이고 무의미한 전쟁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결국 ‘전사(戰士)’들이 쓰러뜨리는 건 ‘적’이나 ‘악’이나 ‘해충’이 아니라, 그들을 거기에 설 수 있게 했던 민주주의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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