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들이 최후의 보루란다. 지난해 통계청은 2018년 역사상 처음으로 1명 미만으로 떨어진 합계출생률에서 1990년대생 부모들을 출생률 반등의 희망으로 내세웠다. 이들의 혼인 건수와 인구를 지켜보았을 때 2021년 이후로 출생률이 증가할 수도 있다는 거다.

혼인 건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출생률도 늘어날 것이란 일부 언론들과 통계청의 낙관적인 희망론은 개인들의 집합을 단지 숫자그 자체로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사고다.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도 없이, 1990년대생, 즉 지금의 2030세대에게 결혼은 차치하고 아이를 기른다는 선택지는 가장 하위의 우선순위에 존재하는 항목이다. 내 주위에만 둘러보더라도 결혼을 고려가 아닌 포기해야 하는 선택 항목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얼마 전 한 드라마에서 청소년 (예비)부모에 임신중절 수술을 포기하게 만드는 장면이 연출됐다. 계획되지 않은 임신을 한 두 청소년이 낙태를 결심하고 병원에 갔다가 초음파 검사의 심장소리를 듣고 출산을 결정하는 장면이 전파를 탄 것이다. 수술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이런 식의 생각 없는 연출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 와중에 당사자인 청소년들은 '사랑이 죄가 아니잖아요'라고 대사를 던진다. 청소년들이 부모가 되는 과정이 설득되기는커녕 당혹스러움만 던지는 대사였다.

심지어 그들의 미성숙함과 철없는 사랑을 문제로 지적하는 어른들의 행태는 그 당혹스러움을 배로 만들었다. 미성년자는 사회적으로 미성숙할 수 있다고 약속된 나이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당연한 미성숙함을 잘못이라 지적해서는 안 된다. 드라마 속 어른들은 너희들의 사랑이 얼마나 갈 것 같냐며 불분명한 사랑을 철없다고 지적할 것이 아니라, ‘사랑만으로 너희의 미래가 흘러가진 않을 것이라 말하며 그들에게 닥칠 현실적인 미래에 대해 조언했어야 했다제작진도 아이를 낳는다는 이유로 사랑이 죄는 아니다라며 낭만을 부여할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육을 할 수 밖에 없는솔직한 청소년들의 말과 함께 기르자는 공동체를 그렸어야 했다.

미디어는 우리나라 출생률 문제가 심각하다고 연일 자극적인 콘텐츠를 쏟아낸다. 그 콘텐츠가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미디어가 현재의 청년 세대들의 고민을 배제한 체 단순히 출생률 증가에만 급급해 출산과 양육을 소재로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방송심의규정이 있는 이유는 국가에서 그러한 콘텐츠를 일일이 규제하기 힘들거니와 아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미성년자들에게도 쉽게 노출이 되기 때문이다.

출산과 양육은 목적과 방향성이 결여된 채 단순히 소재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계획되지 않은 임신임에도 청소년들의 삶보다도 출산을 우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장면에서 채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출산과 양육은 낭만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사랑이 이유가 되진 않는다. 출산과 양육은 청년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거대한 사건이다. 옛말에 한 아이를 기르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도 알고 있는 사실을 2022년의 미디어가 모른다는 건 역행도 아니고 무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출생률이 0명으로 치닫는 것은 여성의 사회진출도, 내 집 마련하기 힘든 시장도, 미어터지는 취업 시장도, 남성들의 육아휴직 제한도 아니다. '잼민이', '노키즈존', '맘충' 같은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찍어내기 시작한 우리 사회 탓이다. 그런데도 그 사회의 문제는 모르겠다고, 그냥 맡겨 놓은 것처럼 출산을 하라 소리치는 미디어와 정부를 청년들이 외면하는 현실이 이기적인 걸까?

[채널PNU 취재팀(부대신문) 이채현(정치외교학, 18) 편집국장]
[채널PNU 취재팀(부대신문) 이채현(정치외교학, 18) 편집국장]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