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적) 공동체와 무위의 공동체에 대한 고찰

현대를 흔히 원자화된 개인의 사회라고 부른다. 원시 공동체 사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공동체적 삶의 역사는 현대 자본제 사회에 들어 급속도로 흔들린 것이다. 공동체란 무엇일까, 왜 지금도 공동체가 중요한 것일까.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하용삼 HK연구교수가 공동체의 기원과 구조, 그리고‘ 무위의 공동체’에 대해 분석했다. -편집자 주

■ 국가·자본·개인 대 공동체·개인
인적 관계에서 국가·자본 관계로 변화한 공동체

현재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대체로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으로 살고 있다. 정말 그런가? 현실적으로 우리는 개인으로 살 수 없다. 내가 있기 위해서, 부모가 있고, 나와 부모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물론 사회에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서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인적 관계 대신에 국가·자본과 관계를 통해서 삶을 영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전근대적)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하면서 살지 않는다면, 국가·자본과 비인간적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전근대적)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상호부조하면서 살거나, 혹은 국가·자본의 보편적인 관계망을 통해서 무연고적인 원자적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인간 삶의 양식을 근대적 개인과 전근대적 공동체로 나눌 수 있지만, 브라질의 아마존에 여전히 원시공동체가 현존하고 있고, 또한 역사적으로 근대국가 이전에 씨족·부족 공동체가 있었고, 이 공동체들이 근대국가의 상상적 공동체로서 네이션이 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현재의 선진자본주의국가에는 자본=네이션nation(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스테이트state(국가)라는 삼위일체 시스템이 존재한다. (1) 먼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방치되면 반드시 경제적 격차와 계급대립으로 귀결된다. 그에 대해 네이션은 공동성과 평등성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자본제경제가 초래하는 모순들의 해결을 요구한다. 그리고 국가는 과세와 재분배나 규칙들을 통해 그 과제를 해결한다.

 
▲ 가라타니 고진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의 교환형태는 화폐와 상품의 등가교환이고, 네이션의 교환형태는 증여-답례라는 호혜교환이고, 국가의 교환형태는 약탈·과세-재분배의 교환이다. 네이션, 국가, 자본에서 구성원들의 관계는 우애, 평등, 자유로 나타난다. 씨족·부족 공동체는 근대국가에 의해서 해체되었지만, 이 공동체들과 근대국가는 상상의 공동체로서 네이션에 의해서 연결된다. 하지만 씨족·부족공동체와 국가는 각각 증여와 답례=우애 그리고 약탈·과세와 재분배=평등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한다. 자본은 상품교환을 통해서 공동체의 물적(공유지)·인적 유대 그리고 국가의 경제적·정치적 유대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은 개인들 사이의 우애와 평등을 해체하고, 빈부·계급 차별을 심화시킨다. 이러한 교환양식 A·B·C의 한계를 넘어서 자유로운 개인들에 의해서 교환양식A가 고차적으로 회복되는 공동체가 어소시에이션(소비·생산 협동조합)이다. 따라서 교환양식D로서 어소시에이션은 자유로운 개인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우애와 평등의 공동체이다.

(1) 다른 말로 하면 네이션은 국가의 시간성, 스테이트는 국가의 공간성을 의미한다. 네이션은 국가의 시간적 연속성에 의해서 분절된 씨족·부족 공동체들의 상상적 통합체이다. 스테이트는 영토·국민·국가라
는 이름하에 공간적 연속성으로 묶여진 통합체이다.
(2)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서울 2012, 31쪽.

 

■ 공동체 내부적·외부적 사유
‘카오스적 사유’는‘ 코스모스적 사유’로 규정되지 않는다

개인은 통상적으로 (전근대적) 공동체·국가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다른 공동체(예를들면 아마존의 피다한 사람들의 공동체)에 간다면, 이 개인은 아마존에서 자신의 공동체에서 통용되었던 습관과 관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 개인이 아마존의 원시공동체에서 그러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면,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나콘다를 통나무로 착각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 내부와 외부(다른 공동체들)는 생활방식의 차이로 인해서 개인의 사유에 있어서도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차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확실하게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에버렛이 아마존의 원시공동체에서 30년 간 생활하면서 직접 연구한 기록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수많은 것을 배운다. 물론 가정교육이라는 좁은 범위를 넘어서서 우리는 배웠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것을 배운다. 가량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작들을 배운다. 즉 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워서 보고, 듣고, 느끼고, 사고하는 것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개인은 공동체(시스템)로부터 배운 것을 반복한다. 그래서 한 공동체의 개인이 확신하는 것이 다른 공동체에서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즉 나의 사유가 공동체의 습관과 선례라는 것을 반성해보는 것이 공동체 외부적 사유이다. 잠깐 여기서 공동체 내부적·외부적 사유의 차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①여기에 컵이 있다(존재한다). ②여기에 이것이 나에게 컵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나는 이것이 컵인가라고 의심한다. 만일 이것이 컵이라고 습관과 관례에 따라서 명명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다만 컵의 가능태이고, 또한 밥그릇·종·예술품 등등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이것은 무한의 가능태이다. ①에서 이것은 지각하는 개인의 순수사유작용(공동체 외부적 실존에서 사유작용)과 상관없이 공동체의 습관과 관례에 의해서 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과 공동체와 관계에서 컵으로 확정된 것이 공동체 내부의 개인에게 은폐된다. 따라서 공동체 내부의 개인은 컵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거나, 못한다. ②에서 이것은 다른 공동체의 타자에 의해서 컵이 아닌 것으로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공동체의 타자는 이것을 전혀 다른 것(밥그릇, 예술품 등등의 것)으로 지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내부는 습관과 선례에 의해서 규정된 코스모스(질서)이다. 공동체 내부에서 개인의 사유는 코스모스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와 반대로 공동체의 외부는 공동체의 습관과 선례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은 카오스(혼동)이다. 그리고 카오스는 코스모스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 무한이다. 이 카오스적 실존에서 사유하는 주체는 코스모스의 습관과 관례에 의해서 규정된 주체가 아니라 순수사유작용으로서 주체이다. 다시 말해 카오스로서 공동체의 외부는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적 주체도 공동체의 습관과 관례를 반복하지 않는 순수사유작용으로서 주체이다.

■ 무위의 공동체
우리는 항상‘ 무위의 공동체’ 속에 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을 폴리스·공동체 내부의 관례와 습관을 따르는 ‘이성(logos)’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행복을 이성의 탁월성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장인이 기능을 가진다는 것은 폴리스ㆍ공동체 내부의 양식과 문화로서 습관과 관례를 자신의 사유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은 공동체 외부적 실존으로서 인간을 ‘아무 할 일도 없는 존재’, 그리고 인간의 기능을 ‘일을 하지 않는 무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기능과 기능 없음의 분리 이전의 인간을 말한다. 그는 기능과 비기능이 분리되는 전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무 할 일도 없는 존재’는 공동체 외부적 실존에서 순수사유작용의 주체와 서로 상응하고, 이들은 무위의 공동체의 개인들이다.

무위의 공동체는 (전근대적)공동체의 대립이 아니라 공동체의 전제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개인들의 노동이 사적 노동으로, 마찬가지로 생산물이 사적 생산물로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전적으로 생산 이전에 정립된 공동체이다. 바로 그 공동체가 개인의 노동을 사회적 유기체의 한 구성원이 직접 행한 기능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따라서 무위의 공동체는 나와 타자 그리고 우리의 삶에 본질적으로 전제되어있다. 우리는 다만 이 공동체를 인위적 공동체로 대치하거나, 인위적 공동체의 상실과 더불어 무위의 공동체에 대해서 잊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국가·자본·네이션의 “모든 정체성과 귀속 조건에 관계하지 않는 새로운 공통존재”를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무위의 공동체는 구체적인 상황에 구체적으로 관계하기 위해서 잠재성과 능력으로 있는 ‘아무 할 일도 없는’ 존재들에 의해서 형성된다. 모든 정체성과 귀속조건에 관계하지 않는 무위의 공동체의 개인들이 구체적 상황에 구체적으로 관계하는 정치를 수행할 수 있다. ‘아무 할 일도 없는’ 개인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고, 이들이 바로 무위 공동체에 상응하는 전제이다. 그러므로 국가·자본에 종속된 (전근대적) 공동체는 다만 무위의 공동체라는 모래 위에 잠시 그어져 있는 선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 할 일도 없는’ 개인들이 구체적인 상황에 구체적으로 관계하면 (전근대적) 공동체는 무위의 공동체로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위의 공동체는 어소시에이션(소비·생산 협동조합) 이전과 이후에도 존재하고, 이것의 전제이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는 기능적으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공동체 외부적 실존으로서 개인은 공동체 내부의 습관과 관례를 의심하기 때문에 무위의 공동체는 시간적·논리적으로 교환양식A 이전에도 존재하고, 지금도 존재하고, 어소시에이션 이후에도 존재한다. 다시 말해 개인은 혼자일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무위의 공동체에 살고 있다.

 

 

 

 

 

하용삼(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독일 브레멘대학교 철학박사(독일근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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