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송경동 시인

지난달 30일, 고은 시인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와 함께 쌍용자동차 농성장 앞에서 송경동 시인의 ‘사소한 물음에 답함’이라는 시를 묵독하는 퍼포먼스를 벌여 이 시는 다시금 화제가 됐다. 이처럼 그의 시는 사회적 약자들과 늘 함께 한다. 용산참사희생자의 한과 분노를 담은 ‘이 냉동고를 열어라’나 붕어빵아저씨 이근재 열사를 추모하는‘비(非)시적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삶의 노래’와 같은 추모시는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는 노동현장의 열사들,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던 사람들을 위한 추모시를 이제껏 100여 편 지었다. 원래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말하기도 꺼렸던 그는 추모시를 읽을 때는 ‘깡패시인’으로 변한다.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마이크를 몇 번이나 파손하기도 해 얻은 별명이다. 또한 추모시를 읽을 때마다 진심으로 그들을 대변해 목 놓아 울어 그를 ‘울보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칭 ‘날라리’였던 그는 소년원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노동현장을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은 다른 길을 제시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시로 만드는 작업은 내가 사람이 되게 만드는 길이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건설 일용직을 전전하던 그는 시를 더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구로동 ‘구로노동자문학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시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다. 부인인 박수정 르포작가 역시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이어준 인연이다. 송 시인은 생계를 위해 시를 쓰면서도 노동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그의 시는 특히 노동에 주목한다.

그의 집은 노동현장과 투쟁장이었다. 미군기지에 맞서 싸우는 평택 대추리 주민들을 돕다가 전경의 벽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기도 하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을 도우려 씨씨티비(CCTV) 탑에 올라갔다가 발목이 부러져 핀을 14개나 꼽기도 했다. 콜트콜텍의 농성장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희망텐트에서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했다.희망버스를 기획하다가 3개월간 구속된 부산구치소는 오히려 그에게 또 다른 휴식처였다. 독방에 갇혀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고 한다. 오랜 떠돌이 생활 중 잠시 정착해 있는 곳의 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병보석 이후 집에서 간만에 휴식기를 갖게 됐다. 한 사람의 시인이 갖는 역할뿐 아니라, 자유인 송경동에 대한 고민도 계속 하고 있다.

 

1967년 전남 여수 출생
2001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에 답함>, 산문집<꿈꾸는 자 잡혀간다> 등 발간
제 12회 천상병시문학상 수상, 제29회 신동엽창작상 등 다수 수상

△구치소 생활 이후에는 무엇을 하며 지냈나
-지난해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기 때문에 재활치료를 하면서 집에서 쉬고 있었다. 덕분에 몸은 좋아졌는데 마음은 아직 낫지 않고 불편하다. 진보정치운동이 많이 쳐지는 것 같고, 강정의 주민들, 현대차 비정규직,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밀양 주민들 등도 힘에 부쳐 하는 것 같다. 이번 달 19일, 전라북도 남원에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을 연다. 쉬는 동안 남원에 내려가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이 쉼터를 만들었다. 국가폭력, 사회폭력, 사회운동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을 위한 쉼터가 될 것이다.

△언어 장애가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전혀 못 느끼겠다
-이제 많이 괜찮아졌나 보다. 어렸을 때는 말더듬이 장애가 있었다. 사람들한테 놀림감이 되기도 해서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꺼렸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3~4시간 전부터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단어가 좋을지 늘 고민했다. 그게 문학 수업이 되었던 것 같다.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문제아여서 칭찬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칭찬을 받은 유일한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내가 쓴 시를 읽고 공개적으로 칭찬해준 일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뛰어든 건설 공사판 일이 힘들었지만, 그 일만 떠올리면 힘이 났다. 그 일이 유일하게 칭찬을 받은 기억이기 때문에 혹시 내가 시를 쓰면 잘할 수 있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게 됐다(웃음). 그때 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칭찬받았다면 지금 화가나 음악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도 추모시는 청탁이 많이 들어오나
-이제껏 추모시를 100여 편 써왔다. 예전에는 추모시를 쓰는 시인들이 종종 있었는데, 요즘 시인들은 이런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추모시는 길어야 2~3일 전, 시 낭송 몇 시간 전에도 청탁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청탁을 받으면 다른 시인에게도 권하기도 하지만, 다들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내가 다 쓰게 되더라.

시간이 많이 없어서 길 가다가 휘갈겨 쓴 적도 있고, 추모장소 근처 PC방에서 작성한 적도 있다. 급박한 시간이라도 추모시를 쓰기 위해서 고인(故人)의 입장을 생각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시가 써질 때가 더 많다. 고인이 내 몸 속에 들어와 시를 쓰고 가는 것이다. 일종의 접신 과정이다. 시낭송할 때 이를 한 번 더 경험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했던 내가 목 놓아 울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평소 시를 쓸 때는 어떤가
-평소에는 시를 단숨에 쓰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날 늘 지나던 길인데도 발걸음을 멈추게 될 때가 있다. 그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이다. 그때는 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수첩에 받아 적는다. 이게 바로 시가 된다.

이 메모를 바탕으로 시를 완성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때의 느낌을 수첩에 적어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적지 않으면 그 느낌이 금방 달아나지만, 메모해두면 1~2년 뒤에도 시를 쓸 수 있다. 메모할 수가 없으면 심장에 그 느낌을 각인시켜둔다. 하지만 이는 잉크로 새긴 것보다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다(웃음)

△시 속 서사 주인공에게서 피드백을 받아 본 적이 있나
-여러 번 있다. 고 이근재 열사의 경우, 폭력배를 고용한 시청의 노점상단속에 걸려 생계를 잃고, 건설 일용직으로 나갔지만 여기서도 일을 얻지 못했다. 좌절한 그는 일산의 가로등에 목을 매고 자결을 했다. 이 이야기를 인터넷 매체에 기고했더니 다음날 이 시를 본 시민들이 일산구청 홈페이지를 다운시키고, 일산구청 입구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고인과 소통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시가 피드백이 되어 돌아온 경우 중 하나다.

사회 고발적인 시뿐만 아니라 개인사를 다룬 시에도 피드백이 있다. <꿀잠>에서 첫사랑에 관한 <읍네형수>라는 시를 썼다. 그 뒤 첫사랑이 자기가 시집에 나왔다고 ‘딸들에게 자랑했다’고 하더라. 반면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가정사도 자주 쓰는데 어머니가 하루는 우시면서 ‘너희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비난하지는 말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우리가 잘 못 살아서 네가 그렇게 힘들었나보다’라는 말을 듣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시인보다는 사회운동가 송경동으로 더 유명하기도 하다.
-나는 생계를 위해서도 시를 쓰면서 배관공이나 용접일 등을 계속 해왔다. 지금은 너무 젊을 때 몸을 혹사해 무릎을 굽히면 시큰거릴 정도지만,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내 시의 주 등장인물이다. 소설은 취재가 많이 필요한 중노동이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시를 쓰기 위해서 현장을 쫓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특별히 더 잘 써지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는 평소 내가 고민하던 지점이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사소한 물음에 답함>에 누군가 당신이 어느 대학 출신인지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과거 학생운동이 사회변혁의 주축이 되던 시기도 있었다. 그 시절, 소외를 느끼진 않았나
- 과거 학생출신 운동가들이 주류를 형성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출신 운동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생출신과 노동자출신이라 해서 역할이나 위치가 다르다고 볼 수 없다. 민중 의식화 측면에서 학생출신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학생운동이 위축돼 그 역할이 현재는 많이 줄어들었고, 노동자출신의 현장 감각을 뛰어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이분법은 사회운동을 갈라놓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사회운동의 기본 전제는 ‘변혁’일것 같은데, 정작 시에서는 ‘혁명’, ‘변혁’, ‘투쟁’이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왜 그런 단어를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는지는 나도 궁금했다.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문제아로 살던 시절과 사회 최하층이라고 하는 건설일용직을 전전하던 내가, 단순히 책 몇 권을 읽고 몇 명의 친구들을 만났다고 해서 혁명을 외친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는 분명한계에 도달한 것이 사실이지만, 현실 사회주의 역시 실패했다. 이 상황에서 같은 방식의 혁명을 외친다면 고민이 부족해 보이거나 모순적으로 보일 것이다. 또, 노동운동을 하면서 혁명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실천, 조직, 시간으로 한다는 것을 배웠다.

대신 자기 해방을 꿈꾼다. 나 역시 부족한 점이 많은 인간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사회 참여를 하고 있지만 풀지 못한 개인사 역시 많다. 누가 해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 자신을 해방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정치체가 등장해 대신 그 역할을 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자위적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버스를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내가 김진숙 선배를 잘 안 것은 아니지만, <소금꽃나무>를 읽고 그 사람의 인생은 한국 노동사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했다. 투쟁이 길어지면 서 전국 각지의 투쟁장이 지쳐 하는게 보였다. 그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사실 처음 희망버스는 치열한 물밑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웃음)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재능교육 투쟁자들,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의 활동가들의 지원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다. 그 이후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희망버스 기획자는 나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여러 사람들이다. 희망버스를 기획한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지만, 희망버스가 멈추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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