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훈 간사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한국의 특산물’이라는 가을이 성큼 와있는데, 계절을 느끼고 계신지요. 이런 지면으로 인사드려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민망함을 무릅쓴 건 지난 한 달 사이에 이 나라에서, 특히 역사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일들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도 보셨겠지요. 사실관계나 출처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교과서가 최종 검정을 통과하고, 차기 당권을 노리는 여당 유력인사가 모임을 꾸려 “좌파와의 역사전쟁에서 승리하자” 운운하더니 그 탈 많은 교과서의 집필자를 첫 강연자로 불렀다는 사실 말입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지요. 새 국사편찬위원장은 그 교과서가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하는 이승만을 옹호하고 미화하는데 맨 앞줄에 서 왔던 사람이며, 새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또한 여당 유력 인사의 모임에 참석하여 그 교과서를 비난하는 이들을 비난했던 사람이라는 소식이 줄줄이 들려왔지요. 계절을 여쭙는인사가 어리숙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업의 태반을 숙면이나 혼몽으로 때워버리는 열등생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졸리지 않던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특별할 건 없었지요. 단지 교과서를 읽어가다 그 사이사이에 어떤 얘기들을 덧붙이셨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 얘기들 덕에 교과서가 실은 얼마나 허름하고 빈곤하며 재미없는 책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활동에 어떻게 방해를 끼쳤는지도 그 때 알았고, 박정희의 또 다른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란 사실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평소 차분하던 당신께서 다카키 마사오를 얘기할 때 감추지 않으셨던 흥분과 떨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박제화된 활자가 아니라 살아 펄펄 뛰며 오늘을 되묻게 하는 것이 역사라는 사실을 어쭙잖게나마 알게 된 시간이 아니었나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뉴라이트’라는 단체가 나타나 연이어 집권한 우파세력과 일체가 되어 결국 교과서까지 손을 댄 것도 이미 꽤 오래되었지요. 지난 정권에서 한 교과서의 ‘좌편향’을 문제 삼아 수정을 지시했던 정부가 금번의 ‘우편향’ 교과서에는 무척이나 관대한 것도 어쩌면 이미 예견됐던 수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백한 사실 오류와 왜곡된 기술로 점철된 교과서의 출간 자체가 한국 민주사회의 발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군사독재와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미화하는 일을 저들의 말대로 진영논리라 치고 그 또한 학계의 사상적 자유이자 표현의 보장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한쪽의 날개를 사정없이 부러뜨리고 진행되는 ‘거대한 우회전’을 한국사회의 갈 길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힘센 자들에 의해‘ 윤색’된 역사는 결국 우회전이 아니라 지독한 퇴행 아니겠습니까.
 
이 땅의 강이 한 정권의 정략물일 수 없듯이, 역사 또한 한 정부의 ‘전리품’일 수 없다 믿습니다. 지난 정권이 함부로 삽날을 들이댔던 일이 후대에 씻지 못할 죄과임이 명백해졌듯, 저들이 마음대로 주물러댄 역사의 갈피 또한 그리 머잖아 찢겨져 나가리라 믿습니다. 좌우의 문제도 아닌 고대의 역사적 사실부터 엉터리로 기술한 교과서에 갈채를 쏟아대는 저들이야 한심스럽고, 끼리끼리 나눠찬 완장을 들이대며 그 엉터리를 기어이 관철 시키고야 마는 작태들은 근심스럽지만, 교육 현장에선 다카키 마사오를 다카키 마사오라 부르는 선생님들이 여전히 많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한국사 선생’의 목소리를 세상 어떤 석학의 강연과도 바꿀 생각이 없는 제자가 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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