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은 한국문학사의 준령이다. 남도방언을 품은 그의 시는 민족어의 미적 가능성을 한층 높였고, 그의 경이로운 시집들로 말미암아 한국문학의 자장은 한껏 넓어졌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을 그의 시편을 결국 교과서에서 덜어내고야 만 것은, 시와는 달리 시인의 삶이 저열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태평양 전쟁을 찬양했고, 친일부역자를 끌어안은 권력자의 전기를 쓴 데다 회갑을 넘겨서는 독재자 예찬시를 지어바쳤다. 단 몇 편에 불과하다는 옹호도 있지만, 일평생 권력지향 내지 순응적인 처세로 일관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고종석은 이를 간명히 요약했다.“ 미당은 시시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시시하지 않은 문학을 이뤄냈고, 그럼으로써 문학이라는 행위 자체가 시시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삶과 역사의 하중에 비하자면, 문학은 그 정도라는 얘기다.

미당까지 갈 것도 없이 문학의 무게를 되묻게 되는 이즈음이다. 휴가를 끝내고 온 대통령이‘ 인문정신문화계 인사’ 열 세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는데, 이 모임의 말미에 한 참석자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하여“ 대통령께서 영원한 여성의 이미지를 우리 역사 속에 각인하셔서 우리 역사가 한층 빛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한다. 아무리 덕담이라지만 낯간지럽다.‘ 문학’을 업으로 삼은 석좌교수급‘ 석학 및 지성’쯤 되면 범접하기 어려운 인문정신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 인간에 대한 예의’란 말을 꺼내기가 민망할 정도로 파탄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파우스트가 그토록 화기애애해도 좋은가.

노골적인 찬가도 등장했다. <현대문학> 9월호에는 뜬금없이 박근혜 대통령이 1990년대에 쓴 수필 4편과 이를 다룬 비평이 수록됐다. 비평을 쓴 이는 영문학을 전공한 명예교수로 대통령의 에세이에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은 작품”이라는 상찬을 내놓았고, 이에 질세라 편집자는“ 절제된 언어로 사유하는 아름다움의 깊이” 운운하며“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라는 독후감을 선보였다. 어느 어설픈‘ 찌라시’가 아니라 국내 최고(最古) 문예지의 최신호가 내보인 경지다. 한국시인협회와 나라에서 손꼽히는 출판사가 미당도 울고 갈 수준의‘ 용비어천가’를 출간했다가 전량 회수한 것도 고작 몇 달 전이었다.

낯뜨거운 해프닝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 작가에게 기어이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젊은 시인과 소설가 137명이“ 우리는 정권 교체를 원합니다”는 광고를 한 일간지에 게재했는데, 여기에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실무를 맡은 소설가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그에게 적용됐다는 선거법의 유난한 경직성도 미심쩍거니와 특정 후보의 이름이 언급되지도 않은‘, 시국선언’에 가까운 내용을 문제 삼은 ‘적극적’ 해석도 의아스럽다. ‘망루의 철거민’과‘ 철탑 위 노동자’를 아파하고, 죽어가는‘ 강과 갯바위’에 절망하는 그‘ 위법’의 문장들에서 오히려, 결코 시시할 수 없는 문학을 본다. 약자의 영토에서 말해야 할 것을 말한 그들 덕에 우리는 간신히, 시시한 문학과 헤어질 수 있었다. 칼로 펜을 누르는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극에는 문학의 시시함만이 아니라 침묵의 끔찍함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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