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은 긴 세월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부역자들이 자주 내세웠던 변명의 하나도 그 세월의 기나김에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백 년은 갈 줄 알았다”던 미당같은 이의 고백이 그랬다. 그에 비하자면 4년 2개월은 짧은 시간이다. 그 4년여 동안 나치 정권에 협력했던 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노르웨이나 네덜란드는 폐지했던 사형제도까지 부활시켜 처단할 정도로 가차 없었고, 강도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은 프랑스조차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드골이 장담할 정도의 대숙청을 단행했다. 여기에 단한 명의 부역자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이 땅의 역사를 포개보는 일은 씁쓸하다. 청산은커녕 친일의 주역들은 여기저기서 명예롭게 되살아나고 기어이 ‘기념’받기에 이른다. 암담하게도, 36년은 그렇게 공과 죄의 경계를 흩드려버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간의 공적이 치명적 죄과를 덮어버린 채로 추앙받는다. 친일 전력자를 기념한 상(賞)과 상(象)의 개수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상으로 기념되는 친일전력자는 거의 모든 분야에 두루 포진돼있다. 동인, 미당, 육당, 팔봉, 난파, 동랑, 용재, 두계, 하성, 인촌, 방일영 등등의 이름을딴 상(賞)은 대단한 권위를 자랑한다. 이대생들이 철거 요구 쪽지를 붙였던 김활란의상(象)은 끄떡없고, 간도특설대 창간에 관여했던 김백일 장군의 동상은 철거 명령에도 건재하다. 거물급 친일파는 그렇게 불멸한다. 그 긴 리스트로도 부족했던지‘ 백선엽 한미동맹상’이 추가됐다.
 
국방부는 항일무장군에 총질을 해댄 만주국의 간도특설대 장교를 그렇게 ‘전쟁영웅’으로 추어올리고, 문화재청은 그가입었던 군복을 비롯하여 여러 친일 인사들의 의복과 유물을 문화재로 등록하려 하며, 국사편찬위원회는 반민특위를 좌절시킨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민적 영웅”이라칭한 교과서를 통과시켰다. 여기에 36년의역사적 유훈을 물어야 하는 일은 참담하고도 허탈하다. 일제 부역과 해방 이후의 공적으로 양분하여 후자가 양호하니 전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저들의 논리는 경악스럽다. 설령 그들의 공적이 압도적이었다 하더라도 그 바탕에 끝끝내 조국과 민족을 저버리지 않은 이들의 피와 눈물이 감지된다면 우리는 그들을 향해 침을 뱉어야 한다‘. 친일을 하면 삼 대가 흥하고 항일을 하면 삼 대가 망한다’는 뼈아픈 비관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히 처단한 프랑스산 격언이다. 당연한 상식이 돼야 할 이 말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요원한 바람인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맹렬히 반대했던 이들에 의해 그 명단에 오른 인물들이 열렬히 추앙되고, 그 직계와 방계의 후예들이 여전히 득세한 오늘에 ‘역사적 교훈’을 거론하는 일은 차라리 가련하다.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다시는 민족 반역자가 없으리라고 결코 단언할 수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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