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사이, 우리는 이 사회가 여전히 전근대적인 계층사회에 머물러 있음을 절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이렇다. 기내식으로 끓여온 라면을 입맛에 맞지 않다고 여러 차례 다시 ‘진상’을 요구하다가 승무원에게 막말과 폭력을 가한 ‘라면 상무’가 나타나고, 곧이어 호텔 현관에서 주차 시비 끝에폭언을 퍼붓다가 지갑으로 지배인의 뺨을 때린 ‘빵 회장’이 출연하더니, 아버지뻘 되는 대리점주에게 물량 떠넘기기를 강요하며 쉼 없이 욕지기를 내뱉는 영업사원의 ‘조폭 우유’가 등장한다. ‘힘 있는 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실연해준 이들 덕에 우리는 단숨에 몇 세기 전으로 회귀했다.
 

애초 이들의 ‘덜떨어진 횡포’에 보내던 야유와 조소는 엇비슷한 ‘활극’이 거듭되면서 공분으로 바뀌었다. 이 사건들이 일부에서 우연히 동시다발한 별개의 사례가 아니라 실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문제라는 인식이 작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감정 노동’과 ‘진상 고객’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갑⋅을’ 관계라는 프레임으로 바뀌어 논의되기 시작했다. 숱한 ‘을’들이 오래된 피멍들을 꺼내 보였고, 나의 경험과 처지에 비춰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에 공감하고 아파하고 분노했으며, 논의는 그 지점에서 폭발했다. SNS를 중심으로 한 여론의 뭇매에 당사자들은 해임되거나 폐업하거나 사직서를 제출했고, ‘울고 싶은 데 뺨 때려준 격’으로 성토가 쏟아졌다. 억눌렸던 ‘을’들이 연대했고, 그 기세에 기업들은 부랴부랴 대책을 발표하고 굼뜬 정치권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간신히, 우리 사회의 해묵은 곰팡이 덩어리 하나가 햇볕 아래 나온 격이다. 
 
‘갑의 횡포’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공개된 ‘조폭 우유’ 통화 녹취록이 3년 전의 것이라는 사실은 그 일례에 불과하다. 가파른 서열 체제의 한국 사회에선 ‘갑’이 거의 무한한 권능을 독식하고 있으며, 유난한 ‘갑질’이 계약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있다는 사실 역시 뼈아프게 경험한다. 재산과 직위는 물론, 때로는 학력과 성별, 심지어 단지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갑의 지위와 ‘생사여탈권’에 다름없는 권력이 부여되고, 서열의 아래에 위치할수록 겹겹의 권력에 ‘희생’될 가능성이 가팔라진다. 일련의 사건은 이에 대한 우리의 참담함을 희비극적으로 환기시켰다.
 
더불어 욕설을 퍼붓던 영업사원이 그랬듯, 거의 모든 ‘갑’은 또한 딱한 ‘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이는 해임과 폐업과 사직서로 수습될 일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몇몇을 솎아낸다고 단박에 건강해질 체질이 아닌 것이다. 언제건 ‘을’의 피눈물이 내 것이 될 수 있음을, 아울러 그 가해자가 내안의 ‘갑’이라는 괴물일 수 있음을 어렵사리 깨달을 일 아닐까. 무릎을 꿇은 채 주문받는 직원과 상품에존칭을 붙이는 어법이 불편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제2의 ‘라면 상무’나 ‘빵 회장’이 될 여지는 충분하다. 을의 ‘저자세’를 당연시하는 사회는 그 물적 성취가 어떠하건 여전히 낙후된 전근대에 불과하다. ‘갑’ 위에 ‘슈퍼갑’이 존재하듯, 무력한 ‘을’아래에도 더 고통받는 ‘을’이 있음을 기억해내는 일에서 완고한 질서의 균열이 시작된다. 불매운동을 넘어 ‘갑’인 동시에 ‘을’인 내 안의 괴물을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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