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집에 들어와
잠든 어머니 등 뒤에 놓인 봉투를 뜯는다
안내서의 ‘바탕체’는 얼마나 거룩한가
미사(美事)를 집전하는 신부처럼 곧게 서 있다

종종 허리가 굽어 펴지 못하겠다며
자리에 눕던 어머니의 등 뒤로
대낮에 그림자 지듯 바탕체가 지나간다

정기적인 암검진으로 조기에 발견하는 것만이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길, 은 너무 길고 길어
미처 손가락으로 따라가지 못했다
꼬리가 긴 ‘ㄹ’이
숲 속으로 나를 잡아당긴다

곧게 선 문자들을 손가락으로 헤치며
숲의 끝에 다다르면
염색약으로도 검어지지 않는
흰 머리칼의 물결
어머니는 숲의 끝에서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숲을 헤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흰 여백에
손가락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숲에는 낡아서 갈라진
손톱들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재봉틀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나둘씩 실뭉치와 함께 사라졌던
손톱들이 아닌가

어머니를 위한 고해성사 기도문
견고한 나무들의 짜임새
내 손가락도 길을 잃은 채
나무 사이의 여백만 문지르며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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