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화(부산예술대 애니메이션) 교수

“1970, 80년대 우리들은 좋은 전시장에 초청되는 유명 예술가의 삶보다 우리의 그림으로 사회변혁을 일구어내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김상화(부산예술) 교수. 김 교수가 민중미술에 뛰어들 무렵은 광주항쟁 시절로, 젊은 작가들이 사회적 발언을 시작한 시기였다. 그 흐름을 타고 동인 ‘현실과 발언’, ‘그림패 낙동강’ 등 무수한 민중작가집단이 생겨났다. 그중 김상화 교수는 동인 그림패 낙동강에서 활동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도래하면서 민중미술도 사그라졌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사회 배경도 이유지만 몇몇 민중화가가 정부의 정책에 따라 ‘작가’라는 영예를 위해 민중미술작품을 미술관에 전시하는데 집중한 것도 원인이다. 김 교수는 “김영삼 정부에서 민중화가 일부는 민중미술을 미술관에 전시하면 작가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박물관의 박제’와 같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 교수는 민중미술의 생명력은 ‘사람들과의 소통’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문화매개공간 쌈을 운영해오고 있다. 김상화 교수는 “그림 값이 비싸게 팔리고 이름을 드높이는 명예보다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라며 “이러한 바람이 쌈을 만들게 한 것 같다”고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인류가 종속하는 한 계급투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민중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고 말하는 김상화 교수. 민중의 존재는 김 교수가 민중화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또한 김 교수는 “사실 나의 활동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갈증을 느낀다”며 “그 갈증이 자극제가 되어 더 좋은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또 다른 원동력을 설명했다.
 
최근 김상화 교수는 민중미술을 표현하기 위한 제 2의 도구로써 영상을 택했다. 민중미술을 회화로 규정짓지 않는 모습이다. 그는 “소통 도구는 회화에서 영상으로 변화했다”며 “영상이라는 매개로 신세대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장이 열리고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이 더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어린이영화제 감독 역시 이것의 일환이다. 이처럼 김 교수는 끊임없이 힘없는 자들을 대변해왔다. 시대와의 타협 없이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가는 김상화 교수는, 이 불편한 세상을 조금씩 바꾸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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