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시대 나사에서 일하며 인간을 달에, 우주에 보내기 위해 노력한 박철 교수. 그는 한국 항공우주공학계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우주산업의 성과를 되짚어내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아폴로 프로젝트부터 우주왕복선 계획까지 핵심 멤버로 참여했고 목성 탐사 때는 팀장으로 활약한 그는 2003년 한국에 돌아와 카이스트에서 새로운 항공우주공학자 발굴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그 공로는 연구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상패로 알 수 있다. 그 중 한 액자 속 깃발이 시선을 잡아끈다. 그 깃발은 우주왕복선에 을 만드는데 기여한 10만 명 중 가장 큰 공헌을 한 1,000명을 선발해 당시 우주왕복선에 태운 깃발의 조각을 수여한 것이다.
  아침 7시 반부터 밤 10시 반까지 그는 하루 온종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노동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이 일을 가장 좋아하고 또 재미있다고 느낀다. 일이 아니라 오락처럼 느끼다 보니 연구를 할수록 혈압도 낮아지더라”며 웃었다. 그는 55세의 나이에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따 지금까지도 하늘을 나는 즐거움에 취해있다. 또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7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다시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있는 박철 교수. 만 78세 노교수의 비행은 여전히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달 31일 멈추지 않는 그의 비행을 함께 했다.

비행기를 처음 접했던 순간 남다른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 그때 이야기가 궁금하다. 항공우주공학자를 꿈꾸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인가?
  대여섯 살 때, 아버님께서 장난감 비행기를 사서 가져왔다. 방바닥을 빙글빙글 도는 비행기가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때부터 비행기에 온 관심을 집중했다. 그림을 그려도 비행기만 그렸고 초등학교 입학한 이후부터는 모형비행기를 만들었다. 그 비행기의 크기가 점점 커져 대학 때까지 비행기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버님은 화학공학자로, 나도 화학을 공부하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화학보다는 움직이는 기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뛰고 날고 움직이는 기계를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래서 고집을 굽히지 않고 비행기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해나갔다.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동시에 비행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어졌을 것 같다. 충분히 정보를 얻을 수 있었나?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분명 시대적으로는 불운한 시기였다. 내가 7살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11살 때 전쟁이 끝났다. 또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발한 곤란한 시대였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의 치하에 살면서 항공에 대한 정보는 오히려 많았다. 그 당시 일본은 세계 최고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고 공중전을 하면 항상 이겼다. 그래서 항공에 대한 일본 서적이 많이 있었다. 또 로켓이라는 개념도 일본 SF 소설에서 등장했고. 그런 모든 정보를 가리지 않고 보면서 지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에 대한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 화학공학자인 아버님의 영향으로 집에는 자연과학 서적이 많았다. 항상 그런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공부하곤 했다. 이미 고등학생 때 지금의 대학교 2학년 수준의 항공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비행기를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를 다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시 어느 정도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냐 하면 어쩌다가 우리 아버님이 손님을 불러놓고 나에게 과학 질문을 했다. 그런데 내가 다 정확하게 답을 말하니까 사람들이 엄청 놀랐다(하하).
  시대적으로는 불운했지만 일본의 항공 서적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 그런 점에서는 분명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보고 할 수가 있었다.

과학자라면 모두 나사(미국항공우주국, NASA)의 생활을 꿈꿀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항공우주공학자로서는 나사에서 연구를 해보는 것이 평생의 소망이라고들 말한다. 그 꿈을 이룬 감회와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나사가 낸 채용 공고가 붙었다. 그것을 보고 지원해서 나사에 입사하게 됐는데 나사에 간 이후에는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그 때는 일을 성공시켜야겠다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런데 당시 나사에 있던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았다. 나사에 가서 40명 정도 있는 과에 배정받았는데 그곳에서 박사 학위가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도 단 한 명이었는데 그 사람이 과장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학사 학위만 있었는데 그 마저도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소위 우주시대라고 불린 그 당시는 많은 기업들이 우주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우수한 인재들은 모두 기업에 취직해버리고 남는 사람들이 나사로 온 것이다. 나사는 정부지원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월급을 많이 받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를 만들었고 달에 가는 것을 성공시켰다. 그 감동은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달까지 간 감동은 말할 것 무엇 있나. 굉장하다. 우리는 특히 내 그룹이 만든 부분이 파트가 제대로 작동 하는지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바라봤다. 성공하고 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나사 생활이 교수님께 남긴 것은 무엇인가?
  나사 생활은 돌이켜 생각해도 좋은 시절이었다. 처음 나사에 갔을 때 나는 분명 신입사원이었는데도 무슨 일만 하면 나를 제일 앞줄에 세웠다. 항공우주공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나사에 간 사람이 나뿐이었기 때문에 같은 과에 있는 동료들을 가르치면서 또 합심해서 일을 했다. 그런 시절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는 연대감과 동지의식이 강하게 형성됐다.
  나사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매우 놀랐다. 한국 사람들의 항공우주공학에 대한 지식수준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사가 성공시키는 많은 일들을 아직 한국이 이뤄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조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자유로운 토론과 공정하고 편견 없는 행동이 자리 잡아야만 훌륭한 조직이 탄생하고 많은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나사는 정말로 이상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이상에 가깝다. 그런 사회가 결국엔 과학기술도 발전시키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연구 환경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연구 환경이 좋은 미국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이공계열 학생들이 많은데 미국 생활을 경험해본 입장에서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지금 강의를 하면서도 우리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하고 또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말은 ‘미국에 갈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인 분야가 매우 많다. 미국에 가면 막연히 더 좋은 보수, 더 좋은 연구 환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우리만의 강점이 분명히 있다. 항공우주공학 분야에만 한정지어 말한다면 내 강의에서 오로지 한국 항공우주공학자가 쓴 논문만으로 진행이 가능할 정도로 한국인이 항공우주공학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하다.

한국에서 항공우주공학 분야 중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바로 ‘나로호 발사’ 관련 이야기다. 나로호 발사는 어떤 의미를 갖는 사업인가?
  나로호 발사뿐만 아니라 우주산업이 중요한 이유는 우선 국방기술이 강화될 수 있고, 동시에 여러 기술이 발전할 수 있어 산업에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우주산업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나로호 발사를 추진하면서 그러한 의식이 점차 싹트고 있다. 우주산업은 비단 우주선을 만들고, 인공위성을 쏘는 것만이 아니다. 한 예를 들어 보자. 포스코는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인데도 최신 기술로 만드는 특수강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바로 그 특수강이 항공우주공학 기술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점차 인식하면서 항공우주공학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나로호 발사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로호 발사를 여러 번 실패했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뒤늦게 우주산업에 뛰어든 것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높은 기술력을 자랑하는 러시아의 기술을 습득해 기술 개발에 나섰으니 곧 우주강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과학자로서 최고의 정점에 올랐지만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1985년 FBI가 나를 5개월 동안 심문한 적이 있었다.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당시 FBI는 내게 ‘네가 미국 기술을 훔쳐서 한국에 보냈다’라며 스파이 혐의를 추궁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는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때 경험이 나를 한국에 오게 하고, 또 후학 양성에 힘쓰게 한 것 같다. 미국에서 배운 여러 가지 경험과 기술, 지식들을 지금 한국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나? 이것이 어떻게 보면 미국 기술을 한국에 전파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일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찾지도 못하는 요즘 20대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먹고 살 걱정하지 마라. 안 해도 된다. 요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굶어죽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더 열심히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굶어죽지 않는다. 꼭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절대 굽히지 말고 해야 한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