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음악의 거장, 인천시립합창단 윤학원 예술 감독

#1 서당 개도 삼년을 하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귀동냥이라도 삼년이나 하면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세기 넘게 같은 일을, 그것도 온 힘을 다해서 한다면 어떨까? 아마 그 분야에 통달해 달인이나 장인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한평생 합창음악의 길을 걸어온 마에스트로, <남자의 자격>에서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흰머리의 지휘자, 인천시립합창단 윤학원 예술 감독도 그런 장인 중 한명이다. 초등학교 때 처음 음악의 맛을 알게 된 그는 고희를 훌쩍 넘기고 75세가 된 지금까지 합창음악 안에서 살아왔다. 살면서 합창보다 재밌는 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윤학원 지휘자. 그는 지금도 취미이자 특기인, 그리고 평생의 꿈인 합창과 매일 새롭게 만나고 있다.

직업, 취미, 특기 모두 음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세기 넘게 음악만 해오셨는데 여전히 음악이 재밌나요?

음악, 특히 합창보다 재밌는 것이 없어요. 지금도 그렇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질리지 않아요.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시도하고 있고 그 과정이 너무 재밌죠. 그래서 심심할 겨를도 없어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고 새로운 곡을 만들기 위해 할 일이 많습니다. 5월에는 프랑스의 아카펠라 그룹 ‘옴’을 초대해서 함께 공연했고, 내년에는 록밴드 ‘부활’과 함께 공연할 예정입니다. 굉장히 새로운 시도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지겨울 겨를이 없죠.

늘 새로운 시도를 위해 노력하신다고 하셨는데, 새롭기만 한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변화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제가 합창단을 변화시킬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이 세 가지 있습니다. 바로 한국적일 것, 그리고 그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하는 것, 끝으로 현대적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잘 할 수 있고,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한국적인 음악입니다. 또한 그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죠. 여기에 현대의 감각에 맞추기 위한 노력이 가미되면 최고의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을 빠져들게 한 합창음악의 결정적인 매력은 무엇인가요?

 독창이나 피아노 연주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한 음악이지만 합창은 전혀 다릅니다. 합창을 하는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고 옆 사람과 함께 잘하기 위해 같이 노력해야하죠. 우리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혼자만 잘해서는 좋은 하모니가 나올 수 없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녹아들어 화음을 이루고 다 함께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앙상블을 이뤄냈을 때 전율을 느낍니다.

 #2 어린 시절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던 날, 그는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다. “어머, 너 노래 참 잘하는구나!”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음악을 하겠다는 꿈을 품게 된 그였지만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때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천공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음악은 그의 운명이었다. 당시로는 드물게 인천공고에 밴드부가 있었고 그는 밴드부장까지 하며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냈다. 변성기를 거치며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고 싶었던 성악가는 포기했지만 대신 인천의 유명한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화성학과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해 처음으로 지휘를 시작했다.

 한 번 어떤 일을 맡으면 최소 몇십 년 동안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쉽게 지겨워하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해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요?

음악을 시작한 지 오십 년이 넘었고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34년, 영락교회 성가대는 거의 40년 동안 지휘했습니다. 또 인천시립합창단도 18년째 맡고 있죠. 사실 융통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길을 택하면 그저 앞만 보고 걸었어요.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합창이 좋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대학시절 처음 지휘를 시작하셨습니다. 부대신문 공통질문이기도 한데, 감독님에게 20대와 대학시절은 어떤 의미였나요?

 20대에도 물론 합창을 했습니다. 좋은 합창단을 쫓아다녔고 좋은 선생님들을 따라다녔죠. 진로나 미래에 대한 고민도 물론 많았지만 크게 흔들린 적은 없었습니다.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합창단 지휘를 계속 했으니까요.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고 그래서 공고로 진학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더군요. 저의 20대도, 인생도 결국은 합창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엔 엄격하고 무서운 지휘자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굉장히 온화해 보이시는데, 실제로 어떠셨나요?

 예전엔 그랬던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음악에 있어서는 조금도 봐주는 법이 없었죠. 선명회합창단을 지휘할 때는 한 곡당 천 번 이상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의 질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지만 많이 온순해졌습니다. 나이를 먹었으니까요.(웃음)

#3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합창단 지휘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합창음악 지휘를 시작한 그는 처음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었다. 아이스크림을 사줘가며, 일일이 손으로 포스터를 붙여가며 모은 아이들은 그의 지도를 거쳐 결국 훌륭한 하모니를 이뤄내는 진짜 합창단이 됐다. 그리고 대학 졸업이후 직업을 찾다 동인천고등학교에 음악교사로 부임하게 됐다. 교사가 된 그가 처음으로 한 일도 합창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만든 합창단은 1년 만에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고, 학교의 자랑이 됐다. 이후 지인의 제의로 극동방송에서 음악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월급은 적었지만 방송국에 쌓인 수천 장의 LP판이 그를 유혹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개의 합창단을 지휘했고, 서울로 옮겨간 이후 마드리갈 합창단을 만들었다. 또한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세계무대에 서는 합창단, 선명회합창단의 지휘자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1970년부터 2003년 까지 34년간 선명회합창단을 맡으며 전 세계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지휘할 곳이 없으면 직접 합창단을 만들었고, 또 우리나라 작곡가의 찬양곡집을 출판하기 위해 직접 출판사를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또 실제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대단하신데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변화시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창의력은 꽤 있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가만히 서서 합창 할 때, 율동을 넣기도 했고 공중에서 내려와 노래한다거나 관중 사이에서 깜짝 등장해 노래하는 등 시도를 많이 했죠. 합창단을 만들 때도 직접 발로 뛰고, 홍보하며 만들었습니다. 하고 싶어서 직접 만들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합창단을 지휘하셨습니다. 평소 합창단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말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앞서 말했듯이 합창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혼자서 잘하는 법을 가르치고 혼자서 잘하기를 강요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고 왕따나 학교폭력 같은 문제도 일어나죠. 자기 자신만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합창을 통해 같이 잘하는 법, 주변 사람도 잘되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정신이 왕따, 폭력 없는 나라를 만들 수 있죠. 지금은 합창 경연대회도 많이 사라지고, 합창단 수도 턱없이 적습니다. 일본만 해도 아마추어 합창단이 2만개가 넘는데 우린 500여개에 불가하죠. 특히 어린이 합창단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합창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습관을 기르고 합창에 익숙해져야 공동체 정신도 길러질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했고, 큰 어려움 없이 차근차근 성공의 길을 걸으신 것 같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실패는 어떤 것이었나요? 물론 실패도 있었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무래도 대우합창단의 해체 때였습니다. ‘파렴치한 지휘자’로 불리기도 했죠. 아마도 리더십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대우합창단이 1987년 큰 성공을 거두고 나서 단원들은 지쳐있었지만, 저는 세계합창계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ACDA(미국합창지휘자연합회) 컨벤션을 위해 더욱 단원들을 재촉했죠. 그 과정에서 마찰이 생겼습니다. 결국 합창단이 해체됐고요. 당시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큰 좌절을 맛봤지만 나중에는 단원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습니다.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해선 많이 인내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죠.

#3 이후 그가 맡은 합창단은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제자들과 자주 만나며 우리나라 합창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1995년부터 인천시립합창단을 맡아 지금껏 이끌어 오고 있다. 이전까지 굴곡이 많았던 인천시립합창단은 그가 맡은 이후 우리나라 최고의 합창단으로 자리 잡았고, 합창계의 올림픽과 같은 ACDA 무대에도 서게 됐다. 당시 ACDA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는 세계에서 단 4개의 합창단만이 초대됐고, 그의 합창단은 첫 번째 곡부터 기립박수를 이끌어 냈다. 명실상부 최고의 합창 지휘자로 올라선 윤 감독은 또 지난해 TV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아졌고 이 시대의 멘토 중 한명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미 합창음악의 장인으로 인정받고 계십니다. 감독님의 남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스웨덴의 유명한 지휘자 에릭 에릭슨은 지금 94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지휘를 하고 있고, 스웨덴 작곡가들의 곡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스웨덴만의 합창을 창조해냈습니다. 제 목표도 같습니다. 오랫동안 지휘하고, 또 우리 작곡가들과 우리의 곡을 합창으로 풀어내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이미 ‘메나리’ 같은 전통 민요곡을 합창해 찬사를 이끌어 냈고, 아프리카에서 이 곡을 달라는 요청이 있을 정도로 세계 합창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계속 강조하듯이 합창이 많이 활성화됐으면 합니다. 합창을 통해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방송출연과 자서전 등을 통해 젊은이들의 멘토 역할도 하고 계신데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저는 천재도 아니고 가진 재주도 별로 없었습니다. 오로지 한길을, 오랫동안 걸어왔기 때문에 앞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좋아하는 길을 걸었다는 것도 중요했죠. 능력의 뛰어남보다 꾸준함과 성실함이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길을 찾아서, 그 길을 성실하고 묵묵하게 걸어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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