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지망생이 늘고 있다. 고용 불안이 거의 없고 삶의 질도 높일 수 있으니 고시 열풍이 뜨겁다. 고시학원 다니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게 어느덧 청춘의 한 단면이 되었다. 이런 모습이 역사에서는 낯설지 않다. 한국은 과거시험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가치의 척도지만, 근대 이전에는 벼슬이 지상과제였다. 일신의 영달은 물론 가문의 성쇠가 관직에 달려 있었다.

과거시험은 10세기 고려 광종이 처음으로 시행했다. 고려는 ‘귀족의 나라’이기 때문에 부모만 잘 만나면 만사형통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조선 못지않게 과거시험을 중시했다. 자연스레 과거 전문 사교육이 번성했는데 ‘해동공자’ 최충이 세운 구재학당의 명성이 높았다. 족집게 과외, 모의고사 등 실전 위주로 가르쳐 합격률이 매우 높았다. 관직에 진출한 동문은 최충의 시호를 따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렀다.

스타 강사도 있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고려 중기의 레전드 강사 진수재가 나온다. 그는 자기 별장에서 특강을 열었는데 과거시험 잘 보려고 수강생들이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나라에서 포상도 해줬다. 충렬왕 때의 유생 강경룡은 제자 10명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서 임금이 하사하는 상을 받았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다. 문과는 다시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와 정부 관리 33인을 선발하는 대과로 나눴다. 통상 과거시험 하면 이 문과의 대과를 가리켰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답게 과거 응시자가 많았다. 18세기 정조 재위기에는 제출된 답안지가 3~4만 장이었다고 한다.

수만 명의 응시자가 한꺼번에 서술형 시험을 치르다 보니 모든 답안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채점할 수 없었다. 명문가 출신이나 성균관 생도가 아니면 답안지를 먼저 내는 게 중요했다. 늦으면 채점과 평가의 기회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를 적은 ‘현제판(懸題板)’과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려고 ‘선접꾼’을 동원했다. 선접꾼들은 시험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 들어가 좋은 자리에 말뚝 박고, 장막치고, 멍석을 깔았다. 자리를 뺏으려고 주먹다짐을 벌이는 일도 많아서 △무인 △왈짜 △힘센 종들을 선접꾼으로 썼다.

과열은 비리를 불렀다. 조선 후기로 가면 과거시험에 온갖 부정행위가 판쳤다. 숙종 때의 일이다. 성균관이 자리한 반촌에서 한 아낙이 땅에 묻힌 노끈을 발견하고 잡아당겼다. 끈은 흙에 매설된 대나무 통과 연결돼 있었고 그 통은 과거 시험장인 성균관 반수당까지 이어졌다. 응시자가 시험문제를 끈에 매달아 신호를 보내면 바깥의 누군가가 끈을 잡아당겨 답안을 작성하고 다시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시험장 안에는 거벽(巨擘)과 사수(寫手)가 있었다. 거벽은 응시자 대신 답안을 지어주는 사람이었고, 사수는 글씨를 써주는 사람이었다. 앞의 ‘선접꾼’과 함께 팀플레이로 대리시험을 치렀다. 응시자는 술이나 한잔하며 자리를 지키면 되었다. 부정행위는 시험장 밖에서도 이뤄졌다. 연줄이 좋은 응시자는 △출제자 △채점자 △감독관 등과 공모했다. 그들은 사전에 문제를 유출하거나, 후한 점수를 주거나, 답안지를 바꾸는 식으로 합격을 도왔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린 19세기에 이르면 과거시험은 공정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세도가에서는 과거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산 정약용은 “한자도 다 못 뗀 어린아이가 장원을 차지한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반면 시골에서 학문과 수양에 매진하다가 과거시험을 보러 온 유생들은 실컷 조롱만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흙수저 청년들은 불공정한 시험에 좌절하고, 세도가 자제들은 허랑방탕하다가 타락했다.

나라에서 인재 등용은 인간의 몸으로 치면 신선한 혈액을 돌게 만든다. 조선 후기에는 젊은이들이 공정한 기회를 잃으면서 혈관이 막히고 신체기능이 멎어 나라가 쓰러졌다.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고시의 공정성에 청춘의 심장이 뛰고, 대한민국의 맥박이 고동친다.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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