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1일 한 권의 책이 출간된다. 가족의 피에 펜을 찍는 심정으로 썼다는 이 섬뜩한 책에는 <조국의 시간>이란 제목이 달렸다. 오직 예약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이 책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즉각적이며 극단적이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미안하다’, ‘조국의 시간은 우리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호응부터 ‘또 뭐라고 혹세무민을 하려고 하는가’, ‘하여튼 이 친구의 멘탈은 연구대상’이라는 비난까지. 저자 조국 전 장관은 이유 불문하고 국론 분열을 초래해 죄송하다지만, 책 출간이 또 한 번의 국론 분열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물론 언론·출판의 자유가 헌법상 보장된 권리인 이상, 최소한의 해명을 해야겠다는 그를 마냥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데 모든 것이 검찰·언론·보수야당 카르텔이 유포한 허위사실이라는 그의 식상한 주장보다는 ‘저를 밟고 전진하시기 바란다’는 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소 상투적으로도 느껴지는 이 표현은 필연적으로 본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일례로 소위 ‘드루킹 사건’에 연루되었던 故 노회찬 전 의원은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며 죽음으로 속죄를 택했다. 그의 바람처럼 사람들은 노회찬을 탓했을지언정 정의당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연 자살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냐는 문제는 남았지만, 그의 희생으로 정의당은 고꾸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국 전 장관의 희생은 무엇인가. 혹시 저를 밟고 가시라는 장렬한 선언의 결과물이 구구절절한 해명문의 출판인가?

대체 무엇이 검찰개혁이었나. 검찰에 대한 피해의식과 트라우마로 절여진 집권여당과 달리, 다수 국민들은 검찰이 잘 벼려진 칼이기를 바랐다. 편을 가르지도, 권력 앞에 고개 숙이지도 않는 칼. 단호하게 비리를 처단해 정의를 실현하는 칼. 다시 시계를 되돌려 본다. 만약 조국 전 장관이 검찰의 칼날에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했다면 어땠을까. 의혹이 제기된 초기부터 수사에 적극 협조하였다면 어땠을까. 국론을 분열시켜 죄송하다는 모호한 사과 대신 진정성 있는 반성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는 굳이 나를 밟고 가라고 외치지 않아도 자연스레 검찰개혁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검찰의 칼날이 살아있는 권력을 베어버릴 만큼 날카롭게 벼려져있음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이토록 위험한 칼이 남용되지 못하게 통제가 필요함을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권여당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검찰개혁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을 문재인 정부가 끌어내리는 촌극으로 끝났다. 하루아침에 개혁의 선봉에서 적폐로 낙인찍힌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도리어 엄청난 지지율 폭등을 경험했다. 이제 그는 살아있는 권력에 당당히 맞선 투사로 자리매김하며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된다. 4·7 재보선의 대참패 이후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까지도 ‘검수완박’보다는 민생우선과 속도조절을 말하고 있다. 이제 이 지겨운 구호의 유통기한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그런 와중에 이 모든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 자가 뜬금없이 나를 밟고 전진하시란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전진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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