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 송진우 선생
고하 송진우 선생

 

고하 송진우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이념 대립을 넘어 통일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오는 8일, 송진우 선생의 생일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 볼까요?

송진우 선생은 18세의 나이에 유학을 결심합니다. 그의 지인 백관수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는 이유를 묻자, 송진우 선생은 ‘적을 치자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는 이치에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오로지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경술국치 이후 유학에서 돌아온 송진우 선생은 3.1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3.1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릅니다. 출소 후 송진우 선생은 친우 김성수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합니다. 송진우 선생은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될 때까지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송진우 선생은 국민의 교육과 민족정신의 함양이 곧 독립투쟁의 시작이라고 생각해 ‘브나로드 국민계몽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 보도도 송진우 선생의 지시였다고 하네요. 

긴 암흑기를 지나,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해방된 조국은 신탁통치로 분열됩니다. 반탁론자들은 자주 국가를 위해 외부세력인 미군정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한 송진우 선생은 미군정과 충돌은 피하고, 국민운동을 통한 점진적인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송진우 선생의 미온적인 태도는 사람들이 그를 찬탁론자로 오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송진우 선생은 과격 반탁론자들에 의해 1945년 12월 30일 새벽 자택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강원택(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송진우 선생은 당시 신탁통치에 대해 신중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했다”라며 “탁치를 둘러싼 좌우 대립, 그 과정에서 발생한 그의 죽음은 사실상 통일 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송진우 선생은 광복 이후에도 이념 대립을 막고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나라가 없어져도 민족이 존재하면 나라는 반드시 수복된다’며 누구보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송진우 선생. 그가 태어난 5월 8일. 다가오는 그의 생일을 맞아, 숭고한 정신을 기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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