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인 엔니우스는 ‘자유는 마음을 청정하고 굳세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호밀밭출판사’ 장현정 대표이다. 이 사람의 이력은 화려하다. 음악을 하다가, 공부도 해봤다가, 글도 쓰고 지금은 출판사 대표를 맡았다. 붉은 벽돌의 아치 입구가 반겨주는 출판사 사무소에서 장현정 대표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 이력의 출발은 인디밴드의 보컬이다. 어떻게 음악을 접하고 직접 활동하게 됐는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에게 카세트테이프를 받았어요. 거기엔 록 음악이 들어있었죠. 여태 듣던 음악과 아주 다르더라고요. 이 음악이 뭐가 매력이었냐고 묻는다면, 그때가 사춘기 시절이잖아요. 부모님이나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이 다 옳은 건 아니겠다, 사회가 돌아가는 것도 좀 부조리한 거 같다고 봤던 거죠. 그게 음악으로 확장된 거 같아요. 특히 록 음악의 가사는 비판적이고 반항적이잖아요. 그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당시 저와 코드가 잘 맞았던 거죠. 2학년 때엔 학교 밴드에서 활동했어요. 근데 악기를 특별히 잘 다루지는 못해서, 보컬을 했어요. 그렇게 음악 활동을 하게 되면서, 음악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근데 학교 밴드엔 잘 적응하지 못했어요. 선후배 위계가 셌달 까요. 그래서 학교 밖에서 다른 학교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었어요. 근데 그 멤버들이 저를 제외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했더라고요. 저도 학교를 사실 그만두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대학은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대학을 가면 음악 하는 건 용인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대학을 갔죠. 아버지에겐 약속 지켰으니 뭐라 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몰래 자퇴했습니다. 그러고 군대를 다녀오고 멤버들과 서울로 올라갔어요.. 3년 동안 음악 활동을 하고 부산으로 내려왔죠.

△ 프로 밴드 활동을 정리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는데, 어떤 사정이 있었나.

음악 하는 게 쉽진 않았습니다. 힘들었죠. 즐기려고 한 건데, 일이 돼버렸죠. 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서 해야 한다는 것도 힘들었어요. 부산에 내려온 이유는 정해진 시공간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향이고, 가족·친구 모두 있는 것도 큰 이유였고요. 수도권에서 있으면 유리한 건 많겠지만, 저에게 그런 건 상관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공간에서 일을 할 수 있잖아요. 곡이나 대본을 새벽에 쓰거나, 강원도로 훌쩍 떠나 쓸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산으로 돌아왔죠.

부산에 온 후엔 매일 아침 도서관에 갔어요. 부모님껜 이직을 준비한다고 거짓말해서, 집에 있기엔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친구들이 퇴근하기 전까지 내내 책을 읽고, 이후엔 친구들 만나고. 그런 일상을 반복했어요. 그렇게 1년 정도 지났을까요. 한 책을 만났죠.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사상>이란 책입니다. 전경갑 교수님께서 쓰신 책인데요. 그전까지는 닥치는 대로 읽어서 뭔가 많이는 아는데 연결도 안 되고 뿌옇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이 책이 그걸 해소해줬죠. 그래서 그 책을 읽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한테 배우고 싶다’. 

마침 그때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어요. 밴드 때도 가사 쓰는 걸 좋아했거든요. 글을 쓰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하니, 책으로 공부해야겠단 차에 교수님을 알게 됐죠. 서울의 어디 교수려니 프로필을 보는데, 부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님이시더라고요. 바로 그날 무작정 전화를 드린 후 찾아뵀어요. 

가서 저는 원래 공부하던 사람은 아니고, 딴따라였는데 그만두고, 지금은 늦었더라도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고, 이 책을 읽었는데 이런저런 게 인상적이어서 선생님께 배우고 싶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교수님이 자신이 있는 신문방송학과보다는 다른 곳에 가야 할 거 같다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디 전화를 거셨어요. 그러고는 저에게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박재환 교수님께 가보라더라고요. 전경갑 교수님께는 인사를 드리고 부산대로 발걸음을 돌렸죠. 그리고 박재환 교수님을 만나서 다시 사정을 설명했어요. 그러니까 대학원 시험을 준비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고 학과 조교를 찾아가니 공부할 책을 여럿 적어주었어요. 

그때 저는 되게 기뻤어요. 그전까지는 책만 읽고 친구만 만나던 불안한 부유하는 삶이었는데, 목표가 생겼잖아요. 그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을 친 후, 대학원에 들어갔죠.

△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출판사를 차린다. 어떤 고민으로부터 출판사를 설립하게 됐는가.

박사과정을 밟기 전까지는 돈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일해서 벌었어요. 근데 박사과정 때는 상황이 좀 달랐죠. 아이도 있고, 나이도 30대였습니다. 이전처럼 보따리장수마냥 일하면서 살 수는 없었던 거죠. 장기적이면서 지속가능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러려면 나의 사업체가 있는 게 좋다고 판단했죠. 

동시에 이런 고민도 있었어요.. 저는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책을 하나 냈는데요. 책을 낼 때 서울을 다녀오면서 생각했어요. 부산엔 왜 출판사가 없지. 그러면 부산에 있는 사람은 책을 내지 못하는 건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시공간의 제약을 굉장히 답답해했습니다. 내가 정해진 시공간에서 자유로운 일을 하고자 부산에 내려왔는데,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게 막연히 ‘아니다’라고 여겼어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박사를 마칠 때 즈음 한 생각이 들더군요. ‘맞아, 나 말고도 부산에 이런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럴 때 어디서든 쓸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이죠. 여기에 안정된 직업에 대한 고민이 더해져, 출판사를 만들겠단 결심으로 이어진 겁니다.

△ 출판사 이름인 ‘호밀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릴 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재밌게 읽었어요. 그곳에 호밀밭이란 공간이 등장하는데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공간이며, 그곳에서 떨어지면 아이들에겐 세상의 때가 묻습니다. 어른이 되는 거죠. 주인공 홀든은 아이들이 세상으로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는 파수꾼이 되는 게 꿈입니다. 저는 이 대사가 인상 깊더라고요. 제 출판사가 호밀밭처럼 되길 바랐어요. 자본이나 권력, 검열과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 생각을 갖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이름을 지었어요.

‘호밀밭’이란 이름에 주변의 여러 반응이 있었는데요. 그중 한 분이 농사지어봤냐고 하더라고요. 농사는 전혀 모른다고 했죠. 그랬더니 밭이 망가지면 억센 작물을 심어 땅의 힘을 살린다고 하셨어요. 그때 심는 작물이 호밀이래요. 그 뜻도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가 척박한 부산의 문화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 다음 세대에게 보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역할도 해보자란 거죠. 부산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선도적으로 해보고, 이를 통해 부산의 문화도 살리고. 그러면서 부산의 토양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 싶던 거죠.

이런 의미들이 다 모여서 ‘호밀밭’이 됐습니다.

△ 처음 몇 년간은 혼자 출판사를 꾸려왔다.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많았죠. 인쇄소에선 전문용어를 쓴단 말이에요. 소구판을 안 떠서 이틀 후에 오라 하면, 소구판이 뭡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러면 그분들이 상사도 없냐, 그런 것도 안 가르쳐주냐고 해서 ‘제가 대표입니다’라고 답했어요. 그러자 그분들이 출판·인쇄 하나도 모르는 애가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면서도 전문 용어를 알려주곤 하셨어요.

서점 유통을 위해 서울에 올라간 적이 있는데요. 우리 책을 받아달라고 한두 시간씩 기다렸어요. 대형 인터넷 유통업체나 대형서점은 작은 출판사 책을 받아주지 잘 안 받아줘요. 도매로 넘겨라, 필요하면 받겠다고 얘기하죠.

이런 것들이 저는 재밌었어요. ‘무시당했다’라거나 ‘못 해 먹겠다’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저는 하나 하나 배워가는 게 재밌었습니다. 처음 해보는 거니까, 이게 이렇게 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죠. 한 권 두 권 만들어가면서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돌이켜 초창기 책들을 보자면 이렇게 만들고 출판사를 했다니 부끄럽더라고요.

어느덧 출판사가 설립된 지 13년이 지났고, 직원도 여러 명입니다. 저희는 책 수가 늘고 어느 정도 매출액이 나오겠단 확신이 들 때, 그에 맞게 직원을 고용하고 회사가 성장하는 식입니다. 느리게 키워왔기 때문에 더 단단하게 성장하는 회사라고 봐요.

그래도 앞으로 더 가긴 가아겠죠. 더 많은 청년이 여기서 밥벌이도 하고, 일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지역사회에서 우리 회사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여라고 생각해요.

△ 직접 쓴 책 <소년의 철학>과 <삶으로 예술하기>를 보면 청년들을 위한 이야기가 더러 나온다. 청년에 대한 관심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무모하게 살아왔던 제 입장에서 드릴 말씀은 없을 것 같긴 하다만…그래도 하나 얘기한다면, 저는 현재 제가 제 삶을 장악한단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주체적으로 살기에, 내 선택이기에 망해도 아쉽지 않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내 삶을 주도하고 있다는 생각은 시스템 안에서 느낄 수 없다고 봐요. 심리학자들이 행복의 제 1조건으로 ‘지각된 자유’를 애기해요. 형식적인 자유가 아닌 자기 자신이 자유롭다고 인지하는 거죠. 이러한 자유 역시 시스템 밖에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이러한 것들을 실천할 기회가 없을 거예요. 가정이 생기고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사회적 압력이 더욱 거세지기 때문이죠.

물론 청년들에게 사회적 압력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쩌면 추상적이거나 아직 현실적 압력은 아닐 수도 있어요. 미래로부터 온 압력인 거죠. 그래서 보다 자신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때가 20대인 것 같고, 소중한 시기인 것 같아요. 그런 시기를 청년들이 조금 불안하지만, 하루하루를 꼭꼭 씹어서 잘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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