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 21일 부산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일 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한 해 동안 부산에서만 3,000명이 넘는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가운데 우리 대학도 온라인 개학과 원격 수업이라는 전례 없는 일 년의 시간을 보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대면 수업이 조심스럽게 재개되고 캠퍼스는 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있지만 안팎에서 들려오는 대학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

산업 구조의 변화와 저성장 기조의 장기화 속에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라는 말이 나온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태백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구직을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도 길게는 몇 년을 더 취직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대졸자 주류사회’의 현실이 된 지도 오래다. 올해 신입생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한 지역 대학이 속출하면서 지역 대학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동안은 지역 대학의 위기에서 수도권 대학 집중 문제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왔지만 눈 앞에 펼쳐진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그보다는 급감하는 학령인구에 있다. 2021학년도 입시를 기준으로 부산 지역 4년제 대학의 정원은 모두 3만6천여 명이었지만 부산 지역 고3 학생의 수는 2만5천여 명에 불과했다. 사실상 예견된 위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렇듯 엄습한 대학의 위기 앞에서 다시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조금은 한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추석이란 무엇인가”가 그러했듯 질문은 언제나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학의 위기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요시미 순야의 설명에 따르면 12세기 중세 유럽에서 탄생하여 15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대학은 16세기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큰 위기를 맞으며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대규모 출판 유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지식의 창출 속도는 빨라졌지만 대학의 대응은 그만큼 민첩하지 못했던 것이다.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로크, 라이프니츠 등 근대의 지적 거인들은 주로 대학 바깥에서 업적을 쌓았다.

대학이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19세기 민족주의의 흐름과 미국식 대학 교육의 부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미국에서 대학은 ‘칼리지’(college)와 ‘유니버시티’(university)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이들은 모두 우리말로는 ‘대학’으로 번역되지만, 칼리지는 주로 과거의 지식을 전수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반면 유니버시티는 과거의 지식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데 목표를 둔다는 차이가 있다. 미국의 칼리지가 실무 교육 중심이고 유니버시티는 연구 중심이라는 말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건대 우리 교육의 목표가 과거의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수하는데 있다면 대학은 우리의 기대보다 무르고 약한 공간인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해 내고 한발 앞서 대안을 제시하는 힘을 기르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대학의 기능이 쉽게 대체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대학 교육은 배운 내용만큼이나 배우지 않는 내용을 능동적으로 채워 나가는 과정을 장려해 나가야 한다. 누군가 이해한 것을 경청하는 인내를 키우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희열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와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 다시 대면 수업이 시작되었다. 다시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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