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동은 안 될 거라 생각했던 탈핵 운동
부산이 목소리 내지 않으면 탈핵은 지역 문제가 돼버려

올해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지 10년이 됐다. 이를 맞아 언론에서 원전 이슈를 조명하기도 했다. 여기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탈핵 운동을 이어온 활동가가 있다. 바로 부산에너지정의행동 정수희 활동가. 

그가 2012년 ‘제21회 민주시민상’을 수상할 때 에너지정의행동 블로그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찬밥 운동이던 반핵 운동을 한동안 부산에서 혼자서 열심히 해왔던 수희 씨’. 2004년 청년환경센터로 시작했던 탈핵 운동을 부산에서 오늘까지 이어오기가 쉽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당시의 일을 묻자 웃으며 현재는 자신을 포함한 3명이 의기투합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의 자택 겸 부산에너지정의행동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내 그는 유쾌한 농담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 언제부터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어른들이 항상 주변에 있었어요. 저는 탈핵 문제를 어릴 때 다닌 교회에서 접했어요. 당시 목사님이 생명운동, 농촌운동 등을 하셨던 분이었어요. 교회를 다니다 보면 수련회를 가잖아요. 거기서 특강을 듣게 됐는데, 탈핵이 필요하단 내용이었어요. 그때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체르노빌의 아이들 사진을 보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핵발전소가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그 기억을 살려 여러 활동을 했어요. 학교 축제 때 동아리 차원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관련한 사진을 전시회를 열기도 했죠.

△ 1998년 환경 현장 활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탈원전 활동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저는 사회학과 98학번인데요. 제가 입학할 당시 농민학생연대활동(이하 농활)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졌어요. 농활이 봉사활동으로 전락했단 거였죠. 그러면서 싸우고 있는 농민과 함께 연대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며, 당시 신고리 1·2호기 건설을 두고 싸우는 서생면 주민을 주목했어요. 우리 학과를 비롯해 10개 학과가 농활을 가지 않고 환경현장활동으로 서생면을 갔어요. 그렇게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자연스럽게 핵발전소 문제에 참여하게 됐던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탈핵 운동이 나의 운동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에겐 새롭지 않은 운동이었어요. 새로운 걸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핵발전소 문제는 저에겐 평이한 일이었던 거죠.

△ 나의 운동이 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1년 정도 쉬었어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뭘 할까를 고민했죠. 원래는 청년진보당 기관지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당시 운동 조직들이 점점 망해가고 있었거든요. 청년진보당도 쪼개져서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됐어요. 방황하고 있던 차에 제의가 들어왔어요. 선배들이 만든 조직 가운데 청년환경센터가 있었어요. 당시 지율스님의 천성산 고속도로 반대 운동에도 함께 하면서 사람이 필요하다더라고요. ‘저기서는 안 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요. 많은 조직이 망해버렸으니까. 그렇게 선배의 제안으로 활동가가 됐죠. 청년환경센터에서 핵발전소 문제를 비롯해 청정산 고속도로, 골프장 등 두루두루 연대 운동을 시작했어요. 시작하고 나니 제 일로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기왕 시작했으니 끝을 보자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갑자기 석사에 진학했다. 무슨 연유였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엔 많은 사람과 함께했지만, 저는 2004년부터 했다고 했잖아요. 어느 시점부터 신고리 1·2호기 운동이 침체기로 접어들었어요. 주민들이 열과 성을 다해서 막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핵발전소는 지어졌죠. 이후엔 시민 단체들도 핵발전소 문제와 멀어졌어요. 시간이 지나도 핵발전소 사고가 나지 않기도 했고, 기후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다른 의제로 넘어간 거죠. 2008년엔 부산에서 핵발전소를 모니터링하고 탈핵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다른 동지를 찾아도 경주, 서울에 있고 부산엔 없었던 거죠. 부산 시민사회와 만날 접점도 점점 줄어들기도 했고요. 계속 고립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대학원 진학은 일종의 탈출구였어요. 그때 부산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사회학과 대학원에 많았거든요. 대학원에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지 않겠냔 기대가 있었던 거죠. 실제로 많이 만나기도 했고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핵부산시민연대를 만들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 2012년에 ‘제21회 민주시민상’을 수상받았다. 소감이 어땠는가.
제가 상을 받기 1년 전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잖아요. 우리 사회 전체가 충격받았던 사건인데, 특히 시민사회가 많이 반성했던 것 같아요. 부산에 핵발전소가 들어설 때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활동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거든요. 부산의 탈핵 문제를 지속해서 관심 두거나 해결하지 못한 데에 반성한 거죠.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이 문제를 놓지 않고 활동한 사람에게 상을 준 것 같아요. 혼자 있게 한 미안한 마음과 이 문제를 놓지 않고 계속 활동한 데의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부산 시민 사회가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어떤 측면에서는 여태 안 하다가 원전 사고가 나니까 뒤늦게 반성하는 모습들이 편하지만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불편함보다도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 저에겐 크게 와닿았던 것 같네요.

△ 여태 활동 속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가.
고리 1호기 폐쇄요. 승리의 기억이랄까요. 탈핵 운동을 환경 운동의 3D 운동이라고도 해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에는 탈핵 운동의 주축은 주민들이었어요. 그리고 그 운동은 정말 치열했어요. 트랙터로 정문을 밀고, 타이어 태우고, 죽창도 나오고. 항상 전쟁터 같았던 기억이 있어요. 하지만 이겨본 적이 없어요. 혹독하게 싸우는 데 늘 지고, 그러니까 욕만 먹고. 이런 운동이 후쿠시마 이후엔 시민운동 영역으로 넘어왔어요. 탈핵을 요구하는 시민이 등장한 거죠. 이런 시민들의 힘이 모여서 성공한 게 고리 1호기 폐쇄인 거죠. 항상 이겨본 적이 없었던 만큼, 고리 1호기 폐쇄를 뺄 순 없을 거 같아요.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예요. 탈핵 의제를 말하고 탈핵 의지가 있는 당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기대가 컸어요. 당선 한 달 후 즈음이었죠.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기념식이 열렸어요. 거기서 대통령이 한국 사회가 탈핵 사회로 가야 한다며, 신규핵발전소를 짓지 않고 노후 핵발전소도 폐쇄하겠다고 얘기했죠. 근데 신고리 5·6호기 얘기가 없어. 백지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뭘까 싶었죠. 

그러다가 바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이뤄졌어요. 그런데 이 공론화 과정이 공평하게 참여자들이 논의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어요.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데 부산은 제외됐어요. 행정구역상 부산엔 신고리 원전이 없기 때문이란 거죠. 토론회도 부산 빼고 열렸어요. 부산 시민으로선 ‘이게 무슨 공론화냐’ 인 거죠. 공론화 과정의 설계나 진행이 기계적이었던 거에요.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국정을 운영하는 공직 사회는 그대로였어요. 바뀌지 않았으니 탈핵 의지가 없었고, 가능하면 바꾸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 기계적인 공론화가 진행되고 신고리 5·6호기는 건설이 재개됐어요. 그러고 발표된 에너지 정책이란 게 60년 뒤 탈핵하겠단 거죠.

그런데 이게 시민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쳤어요. 다들 탈핵됐다고 생각한 거죠. 일종의 눈속임 효과죠. 대통령이 탈핵을 선언한 게 어디냐, 그만하면 됐다는 거죠. 탈핵은 한고비 넘겼으니 기후 문제 등 다른 문제로 넘어가는 게 지금 상황이에요. 그래서 탈핵 운동은 이전과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됐어요.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이번 정부의 탈핵 정책이고 선언이었어요. 그 시작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이고요. 그래서 제일 아프고, 속상하고, 계속 화가 나는 기억인 거 같네요. 

△ 부산은 고리 원전이 가까운 만큼 원전 이슈를 떼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부산 시민이 원전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지니는 게 바람직할까.
탈핵 논의가 점점 시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부산 시민들이 다른 지역 시민보다 핵발전소 문제에 가장 많이 관심을 두고 행동하세요. 아마 핵발전소와 같이 살기 때문이겠죠.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부산이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지역들은 더 이 문제와 멀어지게 됩니다. 부산이 목소리 내지 않으면 다른 지역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만큼 부산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탈핵 문제는 지역의 문제로 국한되고, 우리나라가 핵발전을 그만둔다는 건 더 어려워지겠죠. 그래서 부산에서 지속적인 변화, 희망을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거죠. 다들 일상의 일이 바쁘겠지만, 탈핵과 관련해서 우리가 목소리 내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고 생각했으면 해요. 그리고 함께 행동해줬으면 하고요.

△ 활동가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가.
1년 뒤가 대선이잖아요. 지금 문재인 정부의 탈핵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있는 정책도 제도화되지 않았어요. 그렇기에 탈핵 의지가 있고, 더 강력한 탈핵 정책을 제시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길 바라요. 그러기 위해 대통령이 탈핵 의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겠죠. 그걸 어떻게 해야 할까가 최근의 고민이에요. 개인으로는… 글쎄요. 개인과 활동가의 삶이 별로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라. 고양이 3마리와 행복하게 사는 거 정도가 되려나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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