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이라는 말을 듣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밀려올지 모를 두통(!)을 제쳐둔다면 우리 머릿속을 가장 먼저 차지하는 것은 추상 회화일 것이다. 직접 보았건 도록을 통해 보았건 피에트 몬드리안이나 마크 로스코 혹은 잭슨 폴록의 작품을 연상하면서, 아니면 어느 미술관에서 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추상화를 본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른바 ‘현대미술’이 선사하는 난해함과 현기증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도 몇몇 호기심 많은 이들은 저렇게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은 그림들을 왜 ‘현대미술’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곧이어 그들은 현대가 아닌, 당장 비교할 만한 ‘과거의’ 미술이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정도가 되겠다는 생각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 이 정도까지 무난하게 공감할 수 있다면, 현대미술에서 ‘현대’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감을 잡을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뜻이다.

현대미술의 ‘현대’란?  

‘현대’라는 말은 영어의 ‘modern(모던)’을 번역한 것인데, ‘modern’은 다시 라틴어의 ‘modernus(모데르누스)’라는 말을 어원으로 갖는다. 요즘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모더니티(modernity) △모더니즘(modernism)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 같은 개념들도 마찬가지 어원을 포함하고 있다. 라틴어는 중세의 지배 계층 혹은 소위 ‘교양을 갖춘’ 계층이 사용하던 언어였으니, ‘modernus’라는 말은 중세인들이 그 이전 시대와 비교하여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재를 구획 짓기 위한 요량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러므로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라는 뜻이 영어의 ‘modern’이라는 말에도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음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대미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중세 시대의 미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질문은 “현대미술의 ‘현대’란 어떤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를 뜻하는 말인가?”가 될 것이다.

미술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라는 글에서 현대미술 최초의 회화 작품이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한 번쯤 접해봤을 법한 마네의 작품은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잊고 있었겠지만, 아직 남아 있던(!) 몇몇 호기심 많은 이들 중 한 명은 이런 불만을 토로할지도 모르겠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내가 알던 추상 회화, 그러니까 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처럼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은 채 물감 자국만 난무하는 그림이 아니잖아?마네의 그림은 올랭피아가 침대에 누워 감상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러니까 분명 무언가를 그려 넣은 그림인걸. 게다가 마네의 그림은 폴록의 그림보다는 전체적으로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더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그저 좀 더 투박하고 당돌한 그림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면 이게 왜 현대미술인 거야?”  우리에게 호기심 많은 누군가가 필요한 이유는 어쩌면 이런 불평이 우리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술,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다

티치아노의 그림은 1538년, 그러니까 후기 르네상스 작품이고, 이 시기의 그림들은 그 이전의 전성기 르네상스 그림들 또는 그 이후의 바로크부터 신고전주의에 이르는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비록 시기마다 세부적인 목표는 서로 다를지라도 결국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 또는 사실주의라는 큰 틀에서 예술로써 평가할 수 있는 것에 속한다. 1746년 샤를 바뙤가 제시한 이러한 관점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천 년 이상 (짧게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서구 미술을 지배해 온 미술의 지향점이자 △시 △음악 △회화 △조각 △무용 등 그동안 하나로 묶이지 못하고 여러 분야에 산재해 있던 ‘기술들’을 비로소 ‘예술’ 개념 아래로 가져올 수 있게 만든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이로써 예술은 △문법 △논리학 △기하학 △역사학 △도덕철학 등 여타의 고차적 활동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기존의 고차적 활동들이 자연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과학과 ‘이론들’에 근거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는 활동이 됨으로써 향상된 지위를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고, 예술이 다른 고차적 활동들과 함께 자신의 토대로 삼고자 했던 이성과 합리성은 더 이상 예술이 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빛이 아니었다.

미술의 지향점이 변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영원한 어둠 속으로 침잠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다른 측면, 즉 비합리성과 감성, 상상력과 감정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는 낭만주의가 등장했고, 1839년 사진의 발명 이후로 더는 사실적 재현이 미술의 최우선 목표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달리 말해, 사실적 재현이 물감 자국과 캔버스의 평평한 표면을 투명하게 만드는 만큼 사실적일 수 있었다면, 마네의 1863년 작품인 <올랭피아>는, 그린버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림이 그 위에 그려지는 바탕의 평평한 표면을 솔직하게 선언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대한 어느 호기심 어린 불평 속에서 인상주의 작품인 <올랭피아>가 투박하고 당돌하게 보였던 것은 단지 솜씨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미술의 지향점이 더 이상 사실적 재현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말하자면, 미술은 자신의 매체를 투명하게 만들던 ‘전통’을 그만두게 됐다. 그린버그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변화는 미술이 자신만의 고유한 매체가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통해, 즉 △평평한 표면 △물감 자체의 성질 △그림 바탕의 형태 등에서 그 정체성을 찾는, 그런 의미에서 ‘순수성’을 확보해가는 여정, 다르게 표현하자면 매체의 저항에 점진적으로 굴복해간 역사를 형성하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현대미술의 ‘현대’라는 말이 어떤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에서 출발했는지 이렇게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올랭피아>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그리고 호기심 많은 불평꾼의 시선과는 달리,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아닌 <가을의 리듬>과 함께 현대미술의 회화 작품으로 분류되고 감상돼야 할 좋은 이유를 가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대미술은 이렇게 온전히 설명된 것이 아니라 이제야 그 설명이 갓 시작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러분 앞에 현대미술이라는 미로는 이제 막 시작되었고, 우리는 겨우 입구를 찾았을 뿐이다.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미로를 무사히 빠져나왔듯이, 현대미술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끔 이끌어 줄 자신만의 아리아드네를 만날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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