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은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피란민들을 감싸 안았다. 이로 인해 부산의 산업이나 생활모습  등은 타도시와 다르게 변화해나갔다. 지난 19일 열린 강연에서는 피란수도 부산의 제조업에 대해 들어 볼 수 있었다.

장지웅 연구원이 한국전쟁으로 인한 부산 제조업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지웅 연구원이 한국전쟁으로 인한 부산 제조업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19일 우리 학교 박물관이 주관한 시민인문강좌가 10·16기념관에서 개최됐다. 강연을 맡은 경제통상연구원 장지웅 연구원은 ‘6·25전쟁 전후 부산의 산업’이라는 주제를 유쾌하면서도 깊이 있게 풀어냈다. 

강연은 식민지 해방 후 부산의 제조업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부산은 대기업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특히 대기업을 중심으로 공업이 크게 발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기술자가 빠져나가고 원료 공급이 줄어들면서 대기업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이 시장에 진출하기 쉬운 조건이 만들어졌다. 장진웅 연구원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지역조달 체제를 활용할 수 있던 중소기업들이 성장하게 됐다”라며 “소비시장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중소기업의 특성도 유리하게 작용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의 제조업은 꾸준히 발전을 거듭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급성장을 이루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했다.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보급생산의 중심이 됐다. 특히 원조물자가 도입되면서 부산항의 역할이 확대되기도 했다. 또한 부산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해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부산의 제조업이 급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하지만 부산의 제조업은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장지웅 연구원은 위기의 원인으로 원료 공급체계를 꼽았다. 당시 원료자재의 해외 의존률이 높았던 부산의 일부 산업은 전쟁 전부터 원료난을 겪고 있었다. 원료의 가격이 폭등하면서 수입량이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전쟁으로 인해 낮아진 구매력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부산의 기업들은 전쟁으로 유입된 인구를 노동력으로 사용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승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업체에서 생산된 제품을 구매하지 못했다. 이밖에도 외국의 완제품이 대거 투입되거나 밀수가 성행하는 등 악재가 이어져 부산의 제조업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며 장지웅 연구원은 한국전쟁 이후의 부산 제조업을 ‘한국경제의 요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대부분은 부산에서 시작해서 성장한 후 지역을 떠났다”라며 “도시 자체적으로 공장을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덧붙여 장지웅 연구원은 인적자원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부산 자체적으로 인재를 길러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라며 “인재가 모이면 기업이 몰리고 산업이 성장하면서 경부성장축을 형성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강연을 마쳤다. 

강연을 들은 참가자들은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송년길(동래구, 72) 씨는 “강연의 내용이 매우 유익했고 깊이 있었다”라며 “해당 내용의 강연이 다른 지역에서도 진행돼 부산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강슬기(고고학 17) 씨는 “관련 전공을 배우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한국전쟁 이후 부산의 제조업과 산업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라고 소감을 이야기했다.

6·25전쟁과 피란민들의 도시, 부산’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강연은 총 6주차에 걸쳐 진행된다. 다음 강연은 오는 26일 건설관 301호에서 ‘피란도시 부산의 피란주택’이라는 내용으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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