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산, 그때. 수정산에서 살아나는 로컬리즘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100년 넘게 목도한 초량동의 일본식 가옥. 이곳에 수정산과 얽힌 사람들의 목소리, 자연의 풀 내음이 예술 작품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이렇게 지역사에 기반한 로컬리즘 문화예술이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숲 큐레이터인 박미라 대표와 창파 아트디렉터로 구성된 부산의 문화예술 기획팀 ‘실험실 씨’. 올해 이들은 수정산을 중심으로 지역의 이야기와 생태를 엮어 예술로 표현한 ‘소요의 시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한 그동안의 과정과 결과물을 모두 담아낸 아카이브 전시를 개최했다. 이에 <부대신문>이 직접 아카이브 전시회를 감상하고, 그들과 지역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눠봤다.


묻혀있던 이야기를
파내고, 나누는 일

박미라 대표와 창파 아트디렉터는 지역 연구 단체인 ‘초량 1925’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해당 단체에서 함께 활동하며 초량 인근 지역이 가진 가치를 발견했다고 한다. 특히 창파 아트디렉터는 지역 연구를 통해 수정산 인근의 △초량동 △수정동 △영주동 등 원도심에 숨겨져 있던 작은 이야기에 큰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중 산림녹화에 얽힌 한 지역민의 회상을 소개했다. 부산이 한국전쟁의 피난처가 되면서 당시 지역민들은 민둥산이 돼버린 수정산 깊은 곳까지 들어가 살림을 차렸는데, 80년대 전국적인 산림녹화사업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산에서 쫓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민들은 직접 산에 씨앗을 뿌리고 자체적으로 산림녹화활동을 이어갔다. 산림녹화사업에 성공한 국가라는 명예는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다.

해당 사례를 통해 지역민 개개인의 추억을 통해 지역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음을 박미라 대표와 창파 아트디렉터는 깨달았다. 창파 아트디렉터는 “지역민과의 소통을 통해 예전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친숙했다는 사실을 배웠다”라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역의 이야기를 더 연구하고, 우리의 전문분야인 문화예술을 통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공유하자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실험실 씨가 만들어졌고 소요의 시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예술로 풍부해지는
저마다의 전기

실험실 씨는 소요의 시간을 시작하며 먼저 개인의 자그마한 사건과 추억을 모으기 시작했다. 창파 아트디렉터는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박물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개인의 역사를 보존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지역사를 다룬 대부분의 역사책은 보통 거시적인 사건 중심으로 작성된다. 이 책들은 지역민 개인의 작은 이야기까지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부산의 원도심에서 있었던 전후 세대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사라지고 있다. 박미라 대표는 “실제로 이번 아카이브 전시가 열린 초량동의 일본식 가옥 주위가 작년 즈음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라며 “우리가 재개발로 떠나버린 지역민들의 목소리와 풍경을 남기지 않았다면 이 동네의 역사는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역사의 보존을 위해서는 예술 활동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예술은 구구절절한 글자나 말과 달리 지역의 서사와 풍경을 한 폭에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야기까지 모두 합쳐진 방대한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예술이 적합하다는 이야기다. 창파 아트디렉터는 “예술 작품은 역사를 누구나 감각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라며 “이것이 예술의 역할이자 기능이고 예술가의 소명”이라고 설명했다. 지역민들의 출근길이었던 산복도로, 판자촌 사이를 뚫는 부산 버스 노선 등 여러 이야기들을 병풍에 담은 이번 아카이브 전시 작품이 그 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예술 작품이 우리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산속에서 찾아낸
지역민의 발자취

이어서 실험실 씨는 지역의 생태에도 눈길을 돌렸다. 지역민들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니 수정산이라는 생태환경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얽힌 것이다. 자신을 ‘딱따구리 선생님’이라는 생태명으로 소개한 박미라 대표는 “처음에는 숲 자체에 관심이 있어 산에 자주 갔었다”라며 “그러다 보니 산의 곳곳에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고, 지역이라는 개념은 거주지뿐 아니라 산과 같은 생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작년에 구봉산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소요의 시간을 기획할 때만 해도 지역과 생태, 예술을 같이 바라보는 예술인들이 흔치 않아 프로젝트 진행에 어려움이 생겼다. 그럼에도 꾸준히 실험실 씨는 사계절 내내 산을 걷고, 체험하고, 자료를 채집했다. 아무리 작은 산일지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놓칠 수 없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마음으로 올해 수정산에서도 소요의 시간을 진행했다. 덧붙여 부산의 모든 산에서 생태자료를 수집해 이야기와 엮는 일이 실험실 씨의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지역에서 찾는 예술의 가치
로컬리즘의 문화예술

두 사람은 코로나19 유행 이후 재조명된 로컬리즘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로컬리즘 예술이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활동 범위가 좁아지면서 예술계는 지역이나 동네로 시선을 돌리고 있으며, 이에 지역의 문화를 부흥시키는 예술의  순기능이 주목받고 있다. 창파 아트디렉터는 “지금까지 예술계가 우리의 문화를 외부에 드러내고 세계를 대상으로 경쟁하는 것에만 집중했다”라며 “최근에는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일상에서 미적 체험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라고 말했다.

또한 두사람은 로컬리즘 문화예술을 통해 지역을 되돌아보는 미적 체험이 타인을 이해하고 문화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촉매가 된다고 말했다. 박미라 대표는 “로컬리즘 문화예술은 지역을 돌아보고 자신을 들춰보는 기회를 제공한다”라며 “고향과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알면 타지의 사람들도 자신만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 그들도 나름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소요의 시간 프로젝트의 산책 프로그램이나 아카이브에 참여한 타지인들은 부산과 부산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됐으며, 자신들의 고향에도 있을 이야기를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는 감상을 전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로컬리즘의 문화예술을 통해 너무 먼 곳을 보기보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보길 바란다는 조언을 건넸다. 창파 아트디렉터는 “특히 부산에는 수정산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와 아름다운 생태를 간직한 곳이 많다”라며 “부산의 청년들이 사는 곳 근처의 숨겨진 가치를 더 발견해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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