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산, 그때. 수정산에서 살아나는 로컬리즘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100년 넘게 목도한 초량동의 일본식 가옥. 이곳에 수정산과 얽힌 사람들의 목소리, 자연의 풀 내음이 예술 작품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이렇게 지역사에 기반한 로컬리즘 문화예술이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빽빽한 고층건물과 아파트들, 그 사이에 둘러싸인 일본식 가옥은 이질적이었다. 가옥의 빛바랜 철문 옆에 이곳이 전시관임을 알리는 푯말이 관람객들을 안내했다. 두명이 겨우 들어갈만한 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첫 번째 전시실이 나타났다. 전시실은 수정산에 얽힌 국가적 사건들과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수많은 삶의 파편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방 사이사이로 이어진 병풍에는 산림녹화사업, 산복도로 86번 버스 등 수정산에 대한 키워드와 수정산에 담긴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나무를 심고 곤충 채집을 하거나, 등산을 하던 곳으로도 수정산을 기억했다. 또한 수정산은 죽음과 맞닿은 곳이기도 했다. 어떤 주민은 과거 공동묘지가 많았던 수정산을 회상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산으로 올라가는 어머니와 끝없는 상여의 행렬을 피해 다니던 사람들을 떠올린 것이다. 생생한 증언과 사진 그리고 당시의 뉴스는 수정산과 그에 얽힌 지역사의 교차점을 보여줬다.

병풍들의 끝에는 긴 책상 위에 차례로 진열된 식물 표본들이 있었다. 책상의 한편에는 표본을 관찰할 수 있는 조명과 확대경이 있었다. 이 표본들은 평소에는 너무 작거나 빛이 부족해서 볼 수 없었던 수정산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각각의 표본 옆에는 식물에 대한 설명을 담은 엽서들이 놓여있었다. 이들은 마치 수정산이 식물의 모습을 하고 자신을 소개하는 듯했다. 

이번엔 연못과 풀이 잘 보이는 마당 쪽 복도로 이동했다. 복도의 한쪽엔 두터운 흰 이불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엔 헤드셋이 놓여 있었다. 이불에 앉아 양 손에 있던 짐을 하나 둘 내려놓고 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수정산의 모습을 움직임으로 표현한 무용가의 작품 설명이 흘러나왔다. 마당의 풍경을 응시하고 벽에 기대거나 누우며 느끼는 자연은 감각을 일깨웠다. 이처럼 전시회는 청각, 시각, 촉각을 활용한 새로운 방법으로 수정산을 경험하게 했다. 

타닥 탁 타다닥. 가파른 목조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하니 어디선가 불규칙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나뭇잎, 나무껍질을 본뜬 석고판들이 책상 모서리를 빙 둘러 원형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책상은 턴테이블처럼 천천히 회전했고 깔때기의 바늘이 석고판을 차례로 긁으며 소리를 냈다. 산으로부터 사람의 공간으로 옮겨진 자연의 소리는 수정산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역의 이야기와 생태, 예술을 연결해 지역의 새로운 가치를 이야기하는 전시였다. 방대한 서사의 연속을 단시간에 목격할 수 있었다. 마치 이리저리 산책하듯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을 따라, 수정산의 지역과 생태를 마주한 소요의 시간이었다.

 

수정산의 나무껍질, 나뭇잎을 본 뜬 석고판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다
수정산의 나무껍질, 나뭇잎을 본 뜬 석고판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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