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안방극장은 ‘타임슬립(time slip)’이 대세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시간여행을 하거나 추억을 자극하는 드라마들이 곧잘 얻어걸린다. 만약 추억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대학 시절로 갈 것이다. 다시 역사학도가 된다고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술은 덜 마시고 싶다. 대학 1학년 때는 1년 365일 가운데 300일은 마셨던 것 같다. 동아리든, 동창회든, 하숙집이든, 어딜 가든 술 권하는 시절이었다. 술 마시느라 답사고, 열애고, 탐독이고, 대학 시절의 버킷리스트를 원 없이 지워나가지 못했다. 누가 ‘금주령(禁酒令)’이라도 내려서 술독에 빠진 ‘어린 양’을 건져줬으면 좋았을 텐데….

금주령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조선 제21대 영조 임금이다. 그는 1724년 즉위하자마자 붕당, 사치와 함께 과음을 경계해야 할 폐단으로 지목하고 엄중하게 대처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대궐 안 높은 지대에서 주등으로 뒤덮인 도성의 밤 풍경을 바라보고 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등(酒燈)은 술집임을 알리려고 장대에 매다는 등을 말한다. 왕은 성균관 주변은 밤에 어두컴컴한데 큰 거리는 불야성을 이룬다며 분개했다. 밤늦게 공부해야 할 유생들은 자고 술꾼들만 비틀비틀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8세기 기록들을 살펴보면 술집이 크게 번성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거리의 상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주점이라고 걱정했다. 큰 술집은 관아의 아전이나 별감들이 운영했다. 기생들이 술을 따르는 색주가도 인기를 누렸다. 풍속화가 신윤복의 그림 <주사거배>, <유곽쟁웅>에 그 풍경이 익살맞게 담겨 있다. 손님은 원래 중인과 서민들이 주를 이뤘지만 18세기에는 양반들도 술집 출입이 잦아졌다. 연암 박지원의 <취하여 운종교를 거닌 기록>을 읽어보면 절친들과 의 음주 풍류에 배꼽 잡는다.

집에서도 술을 즐겼다. 탁주와 소주를 널리 마셨는데 아이들도 떠 마실 정도였다. 문제는 마셔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것에 있었다. 술로 인한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 중죄인의 심문과 판결 기록을 담은 <심리록>에 따르면 음주는 살인사건의 주요 동기였다. 치정 다음으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당시에는 교통사고가 거의 없었으므로 사고까지 포함하면 폭음이 최다 사망자를 배출했을 것이다. 이에 영조는 술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狂藥)’이라며 과음하는 풍속을 경계한 것이다. 왕의 뜻은 금주령으로 실현되었다.

조선 시대 임금들은 가뭄이나 홍수가 발생하면 금주령을 내리곤 했다. 당시 술은 대부분 곡식으로 만들었다.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는데 술을 담가 흥청망청 마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정 기간 음주를 통제하거나 술주정을 금하는 수준에서 단속한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달랐다. 52년의 재위기간 동안 가벼운 금주령은 일상적 으로 발동했으며 1755년부터 1766년까지는 아예 술의 제조와 판매, 음주를 원천적으로 금지해 버렸다.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다. 누룩을 공급하는 시전인 국전(麴廛)이 폐지되었고 술집들이 문을 닫았다. 국가의 모든 의식에도 술을 뺐다. 민가의 제사상에는 술 대신 식혜를 올리게 했다. “식혜를 예주(醴酒)라고 하니 이 또한 술”이라는 것이었다. 영을 어기는 자는 관노로 삼거나 멀리 유배 보냈다. 그래도 위반자가 속출하자 극형에 처하기도 했다. 고위직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경남병사(종2품) 윤구연의 집에서 술 냄새 나는 빈 항아리가 나오자 영조는 남대문에 나아가 공개 심문하고 목을 자르게 했다.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이 끔찍한 악몽에서 술꾼들을 구해준 인물은 다름 아닌 정조 임금이었다. 영조의 손자는 술의 폐단, 곧 풍속과 식량 문제를 서생의 고지식한 걱정이라고 일축했다. 술집은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규장각 초계문신 이면승은 “골목이고 거리고 술집 깃발이 서로 이어져 거의 집집마다 주모요, 가가호호 술집”이라고 당대의 한양 풍경을 묘사했다(<감은편> ‘금양의’). 정조는 또 지독한 골초였다. 창덕궁 후원에서 담배를 재배해 수확할 만큼 즐겼다. 그는 담배가 소화를 돕고 불면증을 해소한다고 믿었다. 심지어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할 방도를 규장각에 구하기도 했다. 조선은 그렇게 술담배에 관대한 나라가 되었다.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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