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익(예술문화영상학 17)
      권재익(예술문화영상학 17)

영화평론가 허문영 선생님의 두 번째 평론집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우리는 세상을 보듯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보듯 세상을 본다. 달리 말하면, 영화는 보이는 세상이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화다”. 그가 이 글을 쓸 때, 아마도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참고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게 허문영 선생님의 대답인 것 같다. 이미 세상은 영화고 영화는 세상이라고. 어쩌면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태어난 그 순간 내려진 숙명이고, 결국 영화는 세상과 일치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아닐까? 예컨대 과거 프랑스의 시체공시소에서 ‘전시’된 차가운 시체들의 구경꾼들과 목이 잘리고 피가 치솟는 장면들을 앞에 두고 팝콘과 콜라를 삼키는 영화 관객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혹자는 영화=세상이라는 공식을 지금 적용하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불과 25년 전에 타계한 들뢰즈가, 그러니까 발화된 지 길어야 한 세기, 짧게는 반세기도 채 안 된 그의 예언이 벌써 실현됐다고?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솔직하다면 영화 속에서 얻어지는 피 튀기는 스펙터클과 지금 우리 눈앞에 불타고 있는 저 높은 건물을 보는 것에 질적 차이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언젠가’의 프랑스어 Un jour은 ‘과거와 미래의 어느 때’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데 어쩌면 그도 이를 염두에 둔 것 같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영화의 운명에 대한 종언으로서 말이다.)

현실의 사건들은 짧은 시간에 우리에게 각색된 영화로서 다가온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있다. 허문영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안전이 완전히 확보되는 거리다. 그래서 그 참혹한 현장에 2.35:1의 시네마스코프를 씌운 스크린을 바라보며 팝콘을 먹으며 감상할 수 있을 만한 거리. 이를테면 2004년 동남아시아의 쓰나미 참사의 참혹함을 담은 CD가 인도 암시장에서 “없어서 못 판다”는 내용의 인터뷰, 좀 더 가까운 예시로는 얼마 전 SNS에서 퍼져나갔던 지하철 폭행남 동영상의 빠른 확산, 책에서 잘 설명된 예로는 2011년 우리나라의 아덴만의 여명 작전을 들 수 있겠다. 석해균 선장을 비롯한 한국 선원들이 소말리아 해적의 인질로 잡혔을 때, 총격전을 벌이며 그들을 ‘성공적으로’ 사살하고, 석해균 선장의 허벅지에 우리나라 해군의 유탄이 박혀있었음에도 언론에서 ‘영화 같은 인질 구출작전’이라고 보도했던 그 사건은 우리들의 안전한 안방에서 볼 수 있도록 완전한 액션영화로 각색된 것이다. ‘영화 같은 인질 구출 작전’은 말 그대로다. 그 참혹한 현장을 보면서 공포나 연민을 느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 공포와 연민의 바로 옆에 있는 희열을. 

영화가 세상이 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윤리가 된다. 영화는 때때로 우리에게 윤리적 선택을 강요하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잠시 보류할 수도 있다. 당장의 선택을 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피했던 질문들을 결국 세상을 살면서 마주하게 될 거라는 거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테니 말이다. 아니, 세상은 이미 영화고, 영화는 이미 세상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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