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20년 9월이다. 올해의 소망은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졌고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현실에 놓여있다. 펜데믹, 세계적 전염병으로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자신과 타인 간의 물리적 거리를 2m 이상 유지해야 한다. 손 씻기와 손 소독은 물론이고 외출 시 반드시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으면 생활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요즘 길에서 지나치는 누군가가 기침만 해도 놀라게 되고 불쾌감까지 생긴다. 집 밖을 나올 때 깜빡하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자신을 알아차리면 소스라치게 놀라 재빨리 입이라도 막게 된다. 무엇보다 달라진 일상을 우리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사람들이 어떠한 일을 법으로 받아들일 때와 예의로 받아들일 때 그들의 감수성이 달리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논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백성을 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서 통제하면 백성들은 형벌을 피할 수 있으나 부끄러워함이 없게 된다. 반면 그들을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질서를 지키게 하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바로 잡을 수도 있게 된다”. 법은 일이 일어나고 난 후에 행해지는 타율성을 지니는 데 반해 예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행하는 자율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마스크 착용이 어찌 법으로만 지켜질 수 있는 일인가. 스스로를 단속하여 자신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받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행해질 수는 없을까. 

동양에서의 예는 자기 수양의 덕목이자 인간다움의 행동거지였다. 예가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는 행동 양식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서유럽 문명화 과정에서 배려의 기원이 자기의 감정통제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있다. 세련된 예절을 갖추는 상류층은 그들 스스로 감정 충동의 표출을 억제하고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 예의에 맞도록 자기를 절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 방식에 맞추기 위해서 그들은 타인에 대한 관찰이 필요해졌다. 예의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돌아다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예의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의 기본적인 규율이자 윤리적 삶을 유지하는데 최소한의 질서이다. 예의는 가정과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몸에 밴 것들이 시의에 적절하게 변용되기도 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재생산되기도 한다. 예의가 시대 정신과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고 현실과 괴리된다면 그것은 이미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 생존의 이유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이 요구된다면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 새로운 예의가 된 것이다.

예의에는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양단이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 새로운 예의는 이전과 다른 양식이지만 그 정신은 변하지 않는다.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가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한다. 기왕 가야 할 길이라면 타율적인 법이 아니라 자율적인 예의의 길이어야 한다. 인간의 존귀함이 지켜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현주(교양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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