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왕>
    (감독  임정환| 2019)

매일 비슷한 일상과 풍경, 항상 만나는 사람들이 지루해질 때 즈음 우리에겐 여행이란 설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이 사람을 훌쩍 떠나버렸다. 그럼에도 우리의 곁에는 여행의 대체재가 존재한다. 바로 영화가 그것이다. 평범한 일상에는 없을 법한 이야기와 낯선 인물들을 보려는 것은 결국 현실과 다른 층위에 잠시나마 머무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니까. 일상의 도피처이자 안식처, 이것이 여행과 영화의 공통점이다. 그러니 여행이 우리에게 줘왔던 낯선 감각과 비일상적인 경험의 부재를 영화가 채워야 하는 게 지금의 상황이다. 이러한 논리는 꿈결 같은 여행을 떠나는 인물들의 이야기 <국경의 왕>에서 찾아볼 수 있다.

1부 <국경의 왕>은 유진(김새벽 분)이 겨울의 폴란드 공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밖에 나가 통화를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출국의 이유가 무엇인지 어느 것 하나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심지어 유진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한국인 남자들에게 자신이 일본인이라며 거짓말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과 그녀의 행동은 어떤 의미일까. 바로 여행에서만큼은 그동안의 익숙했던 감각들을 내려놓고 싶다는 뜻이다. 이후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1부의 남은 이야기 또한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이 전개된다. 마약 밀매에 관한 세 남자의 코미디가 펼쳐지거나 폴란드에 있다던 유진이 갑자기 나타나는 등 시종일관 평범하고 선형적인 서사를 거부한다. 이처럼 영화의 구성과 이야기, 인물들의 언행 모두 뒤죽박죽이다. 같은 배우가 갑자기 다른 인물로 등장하고, 사건의 인과도 명확하지 않다. 조각난 시점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가 극을 쪼갠다. 이토록 영화는 무엇 하나 관객에게 친절하게 알려주는 법이 없다.

이렇듯 모호함을 추구하는 연출·구성 방식과 비선형적 줄거리는 우리가 여행에서 흔히 겪는 비일상적 감각의 경험을 극대화한다. 익숙한 상황과 예상보다는 돌발적인 우연으로 전개되는 영화의 흐름이 관객의 당혹스러움과 설렘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는 곧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매력이 여행과 영화의 공통점이란 것을 관객이 깨닫게 해준다. 또한 2부 <국경의 왕을 찾아서>에서는 1부가 모두 영화적 상상이었을 수 있다는 암시가 드러나기도 한다. 유진이 유럽 여행에서 겪었던 특이한 경험을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하고 있다는 단서를 꺼낸 것이다. 즉 여행에서 겪을 수 있는 기이하고 신선한 경험을 온전히 표현할 방법이 영화 매체라는 감독의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국경의 왕>은 내용을 2부로 나눠 여행과 영화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사실 <국경의 왕>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영화가 주장하는 바를 알 수 있다. 국경이라는 엄격한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왕이 바로 영화라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다. 일상과 비일상, 익숙함과 낯섦, 현실과 상상으로 분리된 양측을 영화는 제한 없이 아우를 수 있다는 것이다. 1부를 영화로, 2부를 현실로 표현해 그 경계를 나눈 <국경의 왕>처럼 말이다. 결국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일상의 익숙한 현실에 지쳐있을 때 영화를 통해서 비일상적이고 낯선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음을. 멀리 떠날 수 없는 지금, 스크린 속으로 짧은 여행을 가보는 것이 어떨까.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