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가 폐지 단계를 밟은 지 1년이 넘었다. 장애등급제 폐지의 취지는 장애인을 시혜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시선을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처우가 개선됐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장애인 처우 개선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몇십 년의 숙원사업
장애등급제 폐지

2018년에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면서 장애등급을 장애 정도로 용어를 바꾸고 구분 단계를 줄여 장애등급제를 폐지했다. 기존의 장애등급제는 △팔 △다리 △관절 △시각 △청각 등의 의학적 상태에 근거해 1~6급으로 나눴다. 또한 장애등급에 따라 활동·이동 지원 등의 서비스 신청에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등급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개인의 필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장애의 종류와 중증도가 각기 다른 장애인들을 획일적인 기준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장애인들은 자신이 필요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년 7월부터는 장애등급이 폐지돼 장애 정도가 경증과 중증으로 단순해졌다. 기존 1~3급 장애인은 장애의 정도가 심한 중증장애인, 4~6급 장애인은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경증장애인으로 인정된다. 이에 따라 장애등급제 폐지 전에는 1~3급 장애인만 신청할 수 있었던 서비스를 4~6급 장애인도 신청할 수 있게 됐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권재현 정책국장은 “<장애인복지법> 개정을 통해 장애가 있다면 누구나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라고 말했다.

장애인의 서비스 필요도를 평가하는 조사의 방식도 인정조사에서 종합조사로 바뀌었다. 기존에 실시하던 인정조사는 의학적 기준의 신체·정신적 손상 정도가 중심이 돼 장애인이 처한 상황은 반영되지 못했다. 새롭게 바뀐 종합조사는 장애인의 서비스 필요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수급 자격과 급여량을 결정한다. 별도의 자격심사를 통해 △활동 지원 △보조기기 교부 △장애인 연금 등 주요 서비스 수급 자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신청인의 욕구와 생활환경 등의 세부항목으로 구성된 종합조사표에 따른다. 작년 7월에는 활동 지원 등 일상생활 지원 분야 4개 서비스에 대해 종합조사를 우선 적용했다. 오는 10월에는 이동지원, 2022년에는 소득·고용지원 분야 서 비스로 종합조사 적용 범위가 확대된다.

등급제가 없어져도
남아 있는 등급

장애등급제가 폐지됐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장애 정도에 따라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과 심한 장애인으로 구분하는 것도 결국 장애에 등급을 매기는 행위라는 이유였다. 오히려 장애 정도가 심하다는 말이 장애인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이용석 정책협력실장은 “장애인복지법 개정으로 장애 정도가 경증과 중증으로 분류돼 낙인감을 심화시킬 여지가 있다”라며 “장애등급제를 폐지한 목적을 상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사 방식 바뀌어도
맞춤형 지원에는 역부족

종합조사표로 새롭게 조사 방식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가 지적된다. 인정조사는 신체적 장애와 일상생활을 기준으로 진행됐으나, 종합조사는 환경적 요인까지 포함해 조사 범위가 넓어졌다. 그러나 15가지로 분류되는 장애 유형별 맞춤 항목은 없었다. 조사항목이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객관적 평가가 어렵기도 하다. 게다가 하나의 조사표로 장애 유형별로 필요한 서비스와 개별 장애인의 환경까지 조사하기는 힘들다. 예컨대 시각장애인의 경우 목욕하기와 구강청결은 시각 장애 특성과 무관하다.

조사표의 항목 자체가 장애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종합조사표 항목에는 음식물 넘기기와 배변·배뇨 등 자칫 민감할 수 있는 항목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 숫자로 표현해야 한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최용걸 정책국장은 “현재 종합조사표는 장애인이 자신의 무능함을 숫자로 직접 표시해야만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어 모멸감을 준다”라며 “스웨덴에서 진행하는 조사처럼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주관적으로 묻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지원 서비스 급여량
오히려 줄어든 사람도 있어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기 전 장애인들은 종합조사표가 적용되면 활동 지원 시간이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보건복지부는 활동 지원 시간 감소는 거의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7월 <수요자 중심 장애인 지원체계 개편 2단계 추진방안>에서 활동 지원 급여 시간이 개선됐다고 밝혔다. 종합조사 도입 후 활동 지원 급여 시간이 월평균 119.4시간에서 139.9시간으로 증가했고, 중증 장애인에게 더욱 많은 급여량이 제공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장애인들의 체감은 달랐다. 명확한 이유 없이 활동 지원 서비스 급여량이 하락한 장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발표한 <월 한도액 산정특례(급여보전)적용현황>에 따르면 >종합조사로 활동 지원 서비스 급여량을 판정하자, 인정조사에서 종합조사로 갱신조사를 받은 18,295명의 장애인 중 2,473명(19.52%)의 활동 지원 시간이 삭감됐다. 종합조사로 바뀌면서 활동 지원 갱신대상자 5명 중 1명이 활동 지원 서비스 급여량이 삭감된 것이다. 이 중 월 30~150시간이 삭감된 사람은 6.6%에 이른다. 권재현 정책국장은 “정부의 발표처럼 전체적인 활동 지원 시간은 증가했을지라도, 개인별로 봤을 때는 하락한 장애인들이 분명 존재한다”라며 “활동 지원 시간이 감소한 사람들에게 그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활동 지원 서비스 급여량이 줄어든 장애인에 대한 구제 방법이 산정특례제도뿐인 것도 문제다. 산정특례제도는 활동 지원 급여가 삭감된 장애인에게 정부에서 3년 동안 인정조사 당시의 급여를 보전해주는 제도로 한 번만 쓸 수 있다. 산정 특례 기간이 지나면 해당 장애인의 활동 지원 급여가 하락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이러한 상황을 ‘활동 지원 급여가 하락한 장애인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할 위기에 직면한 것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용석 정책협력실장은 “장애등급제 폐지의 목적은 서비스를 골고루 제공하는 것이었다”라며 “그러나 장애등급제 폐지가 오히려 장애인들에게 서비스를 제한하는 족쇄가 됐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가가 장애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선 다양한 문제에 알맞은 각각의 대책이 필요하다. 장애등급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고 있지만 여전히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과 어려움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장애 서비스 간의 중복 이용이 가능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장애 서비스 간의 중복 이용에 제한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장애인이 하나의 서비스를 이용하면 다른 유형의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인은 △평생교육 △고용 △여가 △대인관계 형성 등의 주간 활동 서비스를 주로 이용한다. 주간 활동 서비스를 이용하면 활동 지원 서비스의 이용 가능 시간이 일정 수치만큼 차감된다. 다른 유형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또 다른 유형의 서비스를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용걸 정책국장은 “장애인 개개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지원 시 간을 차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며 “장애인에 따라 중복 서비스 이용이 필요한 사람도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장애인 복지 예산 편성이 특정 분야에 집중돼 있어 나머지 분야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장애인 256만 명 중 약 10만 명이 활동 지원 서비스를 받고 있다. 하지만 활동 지원 서비스의 예산은 장애인 복지 예산의 48%에 달한다. 나머지 52%의 예산만이 △장애인 연금 △이동 지원 서비스 △편의 시설 △교육 등의 분야에 사용되는 것이다. 권재현 정책국장은 “장애인 복지 예산이 활동 지원 서비스와 장애인 연금에 집중돼 있다”라며 “기본적으로 예산 자체가 늘어나야 하고, 이동 지원 서비스와 편의 시설 등 다른 분야에 예산이 분산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활동 지원 서비스의 예산은 대부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인건비로 지급돼 장애인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부족하다. 이용석 정책협력실장은 “활동 지원 서비스의 예산 비율은 임금상승률에 따라 증가할 것이다”라며 “활동 지원 서비스를 제외한 다른 분야의 예산이 확보되도록 재원을 마련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장애등급제 폐지와 함께 장애인 복지 제도가 공급자 중심에서 서비스 이용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장애등급제 폐지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복지제도가 이용자 중심의 서비스가 아닌 행정 편의적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자들이 정책을 수립할 때 장애인들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정책은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서비스 수급 기준이 유지돼 복지 사각지대가 생겼다. 이에 전문가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을 수립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장애인들의 처지와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용석 정책협력실장은 “서비스의 대상과 양을 결정하는 열쇠는 공급자들이 갖고 있다”라며 “수요자 중심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예산이 늘더라도 장애인 복지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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