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김란사 선생이 이화학당에 입학하기 위해 프라이 학당장에게 한 말입니다. 당시 이화학당은 기혼 금지 학칙이 있었고, 기혼 여성이었던 김란사 선생은 입학을 위해 프라이 선생을 찾아갔죠. 결국 김란사 선생은 이화학당에 입학해 교육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육을 인생의 빛으로 비유할 만큼 교육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김란사 선생. 그의 삶은 어땠을까요?


김란사 선생은 1872년 9월 1일 태어났습니다. 김란사 선생은 당시 신여성 중에서도 가장 진취적이었다고 평가받습니다. 1894년 이화학당에 입학했고, 다음 해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에서 1년간 수학했습니다. 189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했으며, 1906년 국내 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또한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거나, 전도 활동을 하는 등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하네요. 또한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설치에도 기여했다고 합니다. 미국 방문 당시 접했던 파이프 오르간을 교회에 설치하기 위해 모금을 진행했던 것인데요. 이뿐만 아니라 김란사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생을 다하는 순간에도 고종황제의 밀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 위해 베이징에 계셨습니다. 이러한 김란사 선생의 삶은 당대 여성들의 귀감이 됐다고 하네요.


김란사 선생은 여성 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화학당 내에서 △사감 △교수 △교감 등을 거치며 학생들을 양성했습니다. 이 때문에 김란사 선생이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오해받는 일도 있었는데요. 이에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당시 김란사 선생은 이화학당의 교감으로 유관순 열사의 스승이라기보다는 롤모델에 가깝다”라고 전했습니다. 


사회 참여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김란사 선생. 최초의 여성 관비 유학생이나 여성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것만으로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 전반을 조국을 위해 헌신한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다음달 1일 김란사 선생의 생일을 맞이해, 그를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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