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영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석사 20)
장태영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석사 20)

 

지역 기자단으로 취재를 다닐 적에, 창원 창동 거리에 있는 독립출판서점에 들른 적이 있다. 주인장께서는 내게 준비성이 부족하다며 질책을 늘어놓으시다가, 대뜸 내 전공을 물으셨다. “네, 저는 사학과 신문방송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럼, 학생에게 하나 물읍시다. 저널리즘이 뭡니까?”.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사전적 정의를 들이밀자니 너무 학술적인 냄새가 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내 나름의 정의를 갖다 대기엔 허섭해보였다.

“일상에 주관을 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쥐어 짜낸 답변에 주인장께서는 무릎을 치며, “주관, 바로 그거예요. 주관!”이라 말씀하시고는 저널리즘에 대한 당신의 고견을 얘기해주셨다. 그때 경험 때문일까? 가끔씩 저널리즘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일상에 주관을 담는 일’이라고 나이브하게 설명해준다.
얼마 전, 논문을 읽다가 소름이 끼쳤다. ‘이질적인 청중’이라는 대목에서 미국의 상황이 통계로 제시되었다. 1964년, 미국인 5명 중 4명이 읽던 종이신문이 오늘날에는 2명 중 1명으로 떨어졌다는 통계였다. 10년 전 논문이니 아마 더 낮아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종이신문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저널리즘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표상되는 키워드로 신문을 떠올린다. 본원에 가까운 집단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뜻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인터넷이 주는 피상적인 정보의 바다에 표류 중이다. 이제는 더 협소한 카테고리로 유튜브가 등장했다. 초등학생들이 과제물을 수행할 때, 더 이상 네이버가 아닌 유튜브에 검색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말은 상호작용형 매체라지만, 실상은 손쉽게 수령하고 이용하기 좋은 매체일 뿐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정보를 곱씹어낼 여유가 없어진 셈이다. 

현대의 저널리즘은 상업성에 윤색되어 있다. 그 덕에 수많은 언론들이 내세우는 ‘불편부당성’이라는 키워드에는 ‘우리는 중립적인 언론이니 많이들 봐주세요’라는 무언의 선전이 내포되어있다. 그럼에도 신문을, 더 나아가 ‘종이신문’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개개인의 중심인 주관에 있다. 일상과 그 속에 흐르는 수많은 사건에 견해를 가지는 일은 시민으로서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의식이다. 주관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은 개인의 혼탁한 정체성과도 맞물려, 주체성을 잃게 만든다. 신문을 읽으며 스스로 정립한 사고 아래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시간이 필요치는 않다. 그저 신문 한쪽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머리기사만 읽어도 좋다. 그 속에 실린 의미를 읽고 자신의 주관을 세우는 일, 그게 바로 당신만의 ‘저널리즘’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감히 외쳐본다. “지금 당장, ‘저널리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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