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논란으로 떠들썩하다. 시작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이었다. 언론은 기자회견에서 언급된 ‘회계 논란’을 집중 조명했다. 정의연의 회계에는 부실, 횡령의 수식어가 붙었다. 논란은 그들의 활동 방식까지 이어졌다. ‘위안부 소녀상’하면 떠오르는 단체가 정의연인 만큼, 해당 단체는 위안부 활동에선 독보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약자를 농락한 배신자, 죄인으로 추락했다.

논란은 정의연이 여태 해온 모든 활동이 부정적으로 여겨지게끔 만들었다. 의심의 눈초리는 매주 진행하는 수요 집회까지 닿았다. 그러나 정의연과 관련된 문제들이 그들의 활동 모두를 부정할 만큼인지는 되려 의심해봐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 온 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조차 몰랐던 사안의 이름을 고민하고, 계속해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위안부와 관련된 책들에 정의연의 이름이 대부분 저자로 올라가 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와 같은 증언집 출간처럼 증언 연구를 이어온 것도 그들이다.

위안부 운동에 앞서왔던 변하지 않는 진실과 앞으로의 활동 방향은 분리해 봐야 하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들이 여태 해온 활동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여태 정의연과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목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꾸준히 이어온 운동의 정성과 노력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선 반성해야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위안부와 관련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할 투쟁만이 아닐 듯하다. 이용수 할머니는 인터뷰에서 자신을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라고 표현했다. 아직도 피해자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자신을 탓하며 더럽다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해자들조차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전히 사회는 위안부에 무지하다.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르다’는 인터뷰 내용에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30년간 정의연의 활동은 피해자의 인식을 바꾸지 못했고 위안부를 사회에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많은 활동을 통해 이뤄낸 것도 많지만 놓친 것도 많다는 점을 시인해야만 한다.

이번 일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우리 사회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확인했다. 며칠째 신문 1면에 올라갈 만큼 위안부 문제가 관심을 받으면서, 당사자 외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활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한계가 무엇인지 알게 된 지금, 적극적인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는 건 어떨까. 우리의 기억 방식에 대해 되돌아보고, 관련된 작업들을 반성하고, 이를 토대 삼아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는 일. ‘회계’라는 단어가 위안부와 관련된 대부분의 이슈를 삼키고 있지만, 오히려 우리가 더 이야기해야하는 것은 이게 아닐까. 지난달 26일 또 한명의 피해자가 돌아가셨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생존 피해자는 17명뿐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언제까지 회계만 논할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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