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칼 맑스와 함께 19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공산주의 이론가요,혁명가였다.그는 맑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1846)과 <공산당 선언>(1848)을 집필했으며,이 저서를 통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근간으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을 고발하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기반으로 계급투쟁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주장했다. 1883년 맑스가 죽은 이후,그가 남긴 유고들을 모아 <자본> 2권(1885)과 3권(1894)을 발간하고, 난해한 맑스 사상을 대중화하기 위해 분투했다.또한 <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1884)을 통해 남성에 대한 여성종속의 기원을 역사 유물론적 관점에 입각해 분석함으로써, 향후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성장할 수 있는 지반을 놓았다.

75세 영국에서 숨을 거두기 전까지 엥겔스는 ‘부르주아 기업가’라는 어울리지 않은 외투를 걸친 채, 맑스가 죽기 전까지 지적 동반자이자 헌신적인 재정적 지원자로의 삶에 충실했다. 맑스가 죽은 후에는 친구의 지적 유산을 널리 유포하고 두 사람이 함께 설계한 공산주의 이론을 현실화하기 위해 나머지 삶을 모두 쏟아 부었다.사회변혁의 신념을 한순간도 져버리지 않았던 엥겔스의 이 충직함과 투지로 가득한 삶을 추모하면서,공산주의 이론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그는 정신의 거인이었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참상을 고발한 자본가의 아들

엥겔스는 1820년 ‘독일의 맨체스터’라고 불리는 라인란트 주 바르멘에서 면방직회사를 운영하는 부르주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부친의 뜻에 따라 가업을 물려받아야 했으나,천성적으로 공장 경영주로서의 삶에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다.16살에 엘버펠트 김나지움을 중퇴 후,엥겔스는 독일의 산업 전초기지였던 자신의 고향 바르멘과 엘버펠트 일대에서 자행되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실상을 기록한다. 엥겔스는 ‘프리드리히 오스발트’라는 필명으로 <독일 텔레그라프>에 ‘부퍼탈 통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면서 탁월한 저널리스트로서의 삶에 발을 들인다. 19살짜리 기업가의 후계자가 쓴 ‘부퍼탈 통신’은 자본주의적 노동 착취 현실에 내몰린 노동자 계급이 처해 있는 열악한 노동조건, 그리고 이로 인해 야기되는 각종 사회적 부조리와 불평등한 현실을 통렬하게 그려낸다.영국의 맨체스터 체류 시절 ‘부퍼탈 통신’에서 그려낸 산업자본주의의 사회적 비용에 대한 고발은, 산업자본주의의 참상을 기록한 가장 뛰어난 고전 중의 하나로 평가받은 <영국노동계급의 상황>이라는 걸작을 배출한 자양분이 되었다. 

역사적 혁명을 이끈 그들

엥겔스 없는 맑스를,또는 그 역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역사에 ‘만약에’라는 가정
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다는 말처럼,‘엥겔스와 맑스가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처럼 무용한 것도 없을 것 같다.19세기 유럽을 무대로 약간 서로 다른 지적 행로를 통해 이르렀던 두 사람의 견해가,그들 자신의 말마따나 ‘이론적인 모든 분야에서 완벽하게 일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1844년 파리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이후 40년 동안의 흔들리지 않는 우정의 역사를 기록한다.1845년 청년헤겔파의 관념적 급진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된 <신성 가족>을 출발점으로 하여,1846년 역사유물론의 정초한 저작으로 평가받는 <독일 이데올로기>,<공산주의자 동맹>의 당 강령으로 작성된 1848년의 <공산당 선언>은 엥겔스가 맑스와 함께 이뤄낸 인류 역사의 가장 뛰어난 저작들로 자리 잡는다. 맑스와 엥겔스는‘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독일이데올로기>)는 유물론적 견해를 지렛대 삼아,‘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공산당 선언>)라는 테제를 통해 역사를 물적 생활수단을 둘러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투쟁사로 단언한다. 그리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인 소유를 기반으로 현존하는 세계를 자신들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를 전면화하는 부르주아지에 맞설 것을 촉구한다. 자본주의적 착취 체계에 맞서 싸움으로써 잃을 것은 족쇄뿐이며,얻을 것은 전세계이기에,‘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단결하라!’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은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를 관통하는 가장 혁명적인 슬로건으로 빛을 발했다. 

맑스를 위해 살아온 모순적인 삶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엥겔스의 삶은 모순 자체였다. 그는 무려 19년을 영국에서 면방직 회사의 공동운영자로 재직하면서, 그가 고발했던 자본주의 착취 체계의 일원으로 살면서도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적극 주장했던 혁명가의 삶을 살기도 했다.부르주아 상류사회에 드나들면서도,영국 맨체스터 시절 그를 노동자들의 어두운 세계로 안내해준 아일랜드 출신 여공 메리 번즈를 사랑했으며, 그녀가 죽은 이후에는 여동생 리즈 번즈를 반려자로 맞이하면서 그녀의 일가까지 품어주었다. 나이 마흔 아홉, 회사를 은퇴한 후 자본주의 기생적 계급 가운데 하나인 금리생활자로 살면서, 맑스와 그의 식솔들을 생활을 책임졌으며, 공산주의 운동의 대의에 함께하는 동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결코 자발적으로 원하지 않았을 이 모순적인 생활을 엥겔스가 견뎌낸 이유가 맑스 때문이었다는 데에는 아직까지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 공식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엥겔스는 기꺼이 맑스의 지적 후원자 역할을 받아들였으며 그가 죽은 이후에도 맑스의 저작들에 담긴 사상을 확산시키고 대중화하기 위해 힘썼다.

엥겔스에게 지금 자본주의를 묻는다

19세기 혁명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죽은 지 올해로 200년이 된다. 엥겔스는 이미 과거의 사실이 되었다. 우리는 그가 살면서 맞서 싸웠던 산업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진화한 변종적 자본주의의 한복판에 서 있다. 우리들 대다수는 19세기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자리를 찾는 한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으며, 자신의 노동으로 자본을 증식시키는 한에서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노동자다. 자기관리, 자기경영, 자기혁신을 감내하면서 빛의 속도보다 빠른 자본주의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으로 체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주 애용했던 말로, ‘단테의 지옥’을 연상케 하는 이 자본주의 정글 속에서, 엥겔스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건네고, 어떤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질문도 답도 각자가 놓인 상황과 인식에 따라 다를 것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엥겔스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의 그와 소통하려는 모든 자에게 공통된 한 가지 지침이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소환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착취체계를 분쇄하기 위해 뜨거운 삶을 살다간 19세기의 혁명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이란 무엇일까. 엥겔스 탄생 200주년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한 해가 될 수 있을까.

김현(동아대학교 맑스-엥겔스 연구소)공동연구원
김현(동아대학교 맑스-엥겔스 연구소)공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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