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박물관에 소장된 <소하집(蘇下集)>은 조선 말기 경기 이천의 향촌 사족 이재정(李在貞, 1846~1896)의 문집이다. 향촌 사족이라고는 하지만 평생 과거시험에 합격하지도 못했고 벼슬 한자리 얻지 못했으니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시 짓고 글 쓰는 능력이 있어 일상생활을 기록으로 남겼기에 오늘날까지 그 존재가 전해질 뿐이다. 이 책에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금강산 여행기다.

조선 시대 금강산 여행기가 수백 편이 넘으므로 여행기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특별한 것은 그가 여행을 떠나면서 가져간 물건을 여행기 앞에 적어두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희귀한 자료다. 어디 가서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났는지 자세히 적은 여행기는 많아도, 무엇을 가져갔는지 적은 여행기는 드물다. 이 기록은 조선 시대 사람의 여행 필수품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준다.

우선 패도(佩刀) 한 자루. 패도는 휴대용 칼이다. 칼은 여행자에게 쓸모가 많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일명 맥가이버칼)가 지금도 캠핑의 필수품인 것처럼. 다음은 빗 주머니다. 이 안에는 △큰빗 △참빗 △빗털이개 △기름종이 △뿔 조각 △머리띠가 하나씩 들어 있다. 알다시피 조선시대 사람들은 머리를 깎지 않았다. 남자들도 상투를 풀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온다. 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관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여행하는 동안 세수와 양치는 안 해도 머리는 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 큰빗으로 대충 한 번 빗고, 참빗으로 다시 한 번 꼼꼼히 빗는다. 빗질이 끝나면 빗털이개로 먼지를 털고 기름종이에 싸서 보관한다. 뿔조각과 머리띠는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도구다.

허리춤에도 작은 주머니를 찬다. 여기에는 거울과 면빗, 부싯돌이 들어 있다. 거울과 면빗 역시 헤어 관리 도구다. 머리를 감고 나면 상투를 틀고 망건으로 고정해야 하는데, 거울이 없으면 비뚤어지기 십상이다. 면빗은 귀밑머리와 수염을 정리하는 작은 빗이다. 부싯돌은 어디에 썼을까. 휴대품에 담배가 없는 걸로 보아 담뱃불 붙이는 용도는 아니다. 날이 저물거나 비를 맞으면 불을 피우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주머니가 하나 더 있다. 필통 대신이다. 붓 두 자루와 먹 반 개가 들어 있다. 벼루조차 없으니 남의 것을 빌려 쓰거나 움푹 파인 돌멩이를 적당히 주워 썼을 것이다. 이밖에는 책 두 권뿐이다. <서전(書傳)>과 일기장이다. <서전>은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의 해설서다. 금강산 가면서 뭐하러 이런 책을 들고 갔을까. 지금도 여행은 늘 기다림의 연속이다. 비행기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자동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거나 동행을 기다릴 때도 있다. 이럴 때 책이 있으면 시간을 보내기 좋다. 일기장은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는 용도다. 이재정이 매일 일기장에 남긴 기록은 결국 금강산 여행기가 되었다.

이재정이 금강산 여행에 가져간 물건은 이것이 전부다. 여벌 옷은 없나? 없다. 여행하는 동안은 단벌로 버텨야 한다. 걸어 다니는 여행자는 짐을 많이 가져갈 수 없다. 그 밖에도 필요한 물건이 많겠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돈만 가져가면 어찌어찌 해결이 되겠지만, 당시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탓에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사기 어려웠다. 여행 중에 먹을 음식까지 필요한 건 전부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도 짐이 이것밖에 안 된다니, 단출하다 못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재정이 금강산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데 45일이 걸렸다. 지금이라면 유럽 일주를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행은 갈수록 짧아지고 편리해지는데 짐은 반대로 늘어난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안에 △지도 △책 △노트 △필기구 △사진기가 전부 들어가는 세상인데도 여행이 며칠만 넘으면 짐이 캐리어를 가득 채운다. 어째서일까. 불편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 여행을 가면서도 집처럼 편안하기를, 아니 집보다 편안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불편한 여행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숙소를 기대하며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이란 본디 익숙한 일상과의 결별이다.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여행의 본질이다. 여행이 불편하다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할까. 코로나 사태로 여행의 열기가 주춤해진 지금,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무엇을 위한 여행인가?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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