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기념’의 나라다. 전국에 기념관만 125개가 있고 비슷한 역할을 하는 기념공원, 전시관 등을 고려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우리나라에 있는 시청의 개수가 100개가 채 안되므로 규모가 있는 도시라면 기념관이나 기념공원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기념비는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기념 대상 대부분은 △독립운동 △6·25전쟁 △민주화운동 △역사적 위인 등이다. 굳이 숫자로 따져보지 않아도 우리나라에서 기념은 일상이다. 학생들은 기념관으로 체험학습을 가고, 매년 무언가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우리는 무엇을 그리도 기념하는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기념비(Monument)를‘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기 위하여 세운 비’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문장은 단순하지만 기념비가 가진 함의를 잘 포괄하고 있다.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서는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이 필요하며, 기념비는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독일의 영문학자 알라이다 아스만은 그의 저서 <기억의 공간>에서 이런 기념비의 기능을 ‘송덕(頌德)’이란 단어로 정리했다. 그는 송덕이란 행위가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생명을 주입하는 것이며 기념비는 송덕의 정당함을 위한 증거물로 기능한다고 봤다. 그 결과, 대상이 되는 사건들은 미래 지향적이고, 잊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 된다고 아스만은 말한다.

기념비가 가진 송덕의 기능은 기념 대상에 대한 열렬한 찬양으로 이어진다. 가령 어떤 인물의 위대함을 다룬 기념비는 그 사람의 중요성과 업적을 드높이고 치부를 가리는 데 집중한다. 독립운동 같은 사건을 다룰 때는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위대한 업적인지를 칭송하는 데 힘을 쏟는다. 여기에 반기를 드는 것은 기념비의 엄숙함 때문에 차단된다. 전통적인 기념비가 보여주는 이런 경향은 기념비의 건립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점을 함의한다. 기념비를 만드는 집단은 송덕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는 찬양하고 오래 기억시키려고 한다. 동시에 그 외의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구연정(숭실대 독어독문학) 교수는 “모든 기념비는 보통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인물, 사건, 주제를 기념한다”며 “이를 통해 그것을 세운 국가, 민족, 사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기념비를 짓는 것은 전 세계의 보편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국가, 정권들이 기념비를 교묘한 통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정치체제 △민주화 여부 △경제적 발전 정도에 따라 그 모습은 다르긴 하지만, 모두 기념비를 열심히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내고 있다. 프랑스의 개선문, 미국의 러시모어산과 같은 세계 여러 나라의 기념비가 예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서구 사회에서는 기념비가 활용되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찬양’으로 점철된 기념비의 내용적 한계와 정치성 외에도, 이것이 ‘망각’을 일으킨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사람들이 ‘기념공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기념비를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상에서 기념비가 다루는 사건을 잊고 산다는 점이다. 기념비가 가진 이런 단점들을 비판하며 등장한 것이 ‘반(反)기념비(Counter-Monument, Memorial)’다.

기념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하라

  반기념비란 용어는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기 위해 지은 조형물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70년대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기 위해 나치의 전쟁범죄를 기억하는 조형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념비의 문제점과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한다는 것은 독일 사회의 어두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함이고, 따라서 기존의 방식처럼 웅장하고 거대한 기념조형물을 만드는 것이 모순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 프라이강(Christian Freigang)(베를린자유대 예술사학) 교수는 “70년대부터 몇몇 지식인들이 기념비가 그것을 만든 사람이나 단체를 띄우는 데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뒤 반기념비 사조가 시작됐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기존 기념비에 반하는 형식의 기념조형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기념이 아닌 기억 그 자체를 위해 만들어진 이 조형물들은 △길거리 △정류장 △광장 등 ‘일상의 공간’에 세워졌다. 기념비처럼 ‘기억을 위해 준비된 공간’에 세워져 초래하는 망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92년 영문학자 제임스 E. 영(James E. Young)은 이런 독일 홀로코스트 기념 조형물들의 특성을 정리해 ‘반기념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처럼 ‘반기념비’는 말 그대로 전통적인 기념비의 대척점에서 태어났다. 반기념비는 기념비와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게 만든다. 특정 대상이나 사건을 기억하게 한다는 목표는 같지만, 수행 방식은 반대다. 기념비가 숭앙과 추모 등 관객이 느껴야 할 감정과 생각을 명확하게 제시한다면, 반기념비는 그것을 관객의 몫으로 만든다. 전진성(부산교육대 사회교육학) 교수는 작년에 열린 ‘서울은 미술관 컨퍼런스’에서 ‘반기념비는 특정한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기억하는 행위 자체를 재현한다’라며 ‘기억할 대상보다 기억의 형식과 이데올로기적인 전제를 되묻는다’라고 말했다.

끊임없는 기억의 도시 베를린

  반기념비의 실제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독일로 떠나보자.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는 곳곳에 독일의 과거사와 관련된 조형물이 있다.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설공연장 베를린 필하모니 옆에는 나치가 안락사시킨 수많은 △장애인 △동성애자 △유대인을 기억하기 위한 푸른 유리벽이 있다. 홀로코스트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사용하던 건물이 있던 곳에 자리한 버스정류장은 그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한다. 베를린의 중심부로 향할수록 기억의 밀도는 점점 높아진다. 독일 국회의사당 옆에는 베를린 장벽을 뛰어넘다 사살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십자가가 박혀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전쟁 중 희생당한 집시 일족을 기억하며 작은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베를린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서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만나볼 수 있다. 어떤 문구나 장식도 없는 2,711개의 콘크리트 비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돼 있는데, 첫인상은 기이하단 말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관객들은 비석 사이로 들어갈 수 있으며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땅이 꺼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방에 설치된 콘크리트의 압박 속에서 사람들은 이 구조물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추모비는 관객에게 모종의 압박감과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기념비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거부하며 관객에게 감상을 일임하는 반기념비의 속성을 짙게 드러낸다. 베를린 어디서나 이런 조형물들을 마주할 수 있다. 독일의 시민들은 이를 통해 나치 독일의 범죄, 동서 분단의 기억 등 독일의 아픈 과거를 계속해서 마주한다.

반기념비는 이제 독일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됐다.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역사의 비극들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어디서나 기억해야 하는, 잊어선 안 될 대상이다. 독일인 에스더 딤케(Esther Dimke)(독일 괴팅겐, 47) 씨는 “독일에서 수많은 재앙이 일어났던 것을 잊어선 안 된다”라며 “이런 반기념비들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에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크리스티안 프라이강 교수는 “현재 독일에서 반기념비 사조는 넓게 수용되고 있으며, 이것을 독일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잘못된 과거는 기억을 통해서 구원될 수 있을 뿐

  기념비로 되새기는 기억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기념비는 국가와 사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외의 기억을 함몰시킨다. 사람들의 사고력을 빼앗고 선택적 망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기념’과 ‘기념비’ 이외의 방법으로 과거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따라서 한국사회에는 새로운 역사의 기억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저 기념하기에는 힘든 사건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노근리 학살 △삼풍백화점 붕괴 △용산참사 △세월호 사건 등 수많은 비극과 참사들이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노근리 학살은 미국이 개입됐단 이유로 수십 년 동안 묻혀있었다. 최근에야 기념공원이 조성됐지만, 여전히 종래의 ‘기념’이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용산 4구역 재개발부지에서는 참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고층 아파트만 들어서고 있다. 아무리 큰 사건 사고라도 매년 돌아오는 기일정도가 아니고서는 관심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각에서 이런 사건들을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는 있지만 아직 미약해 보인다.

반기념비를 세우기 전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의 상흔을 지우지 못한 전후 독일 사회는 아픈 과거를 마주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구연정 교수는 “전쟁 직후 출간된 독일 소설들을 보면 전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다리를 잃었지만, 그에 대해 어머니도 묻지 않고 아버지도 대답하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라며 “고통스러웠던 전쟁을 ‘망각하려는’ 경향이 전쟁 세대에서 주로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차원의 슬픔과 잘못을 외면하려고만 한 것이다. 그러나 망각은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통일 독일의 첫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äcker)는 1986년 의회 연설에서 “잘못된 과거는 기억을 통해서 구원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처럼 독일은 스스로의 과거를 구원하기 위해 과거의 오점을 기억하려는 노력을 반기념비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독일의 모습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반기념비를 세우기 전의 독일과 비슷해 보인다. 비극과 참사를 외면하는 모습에서 2차대전의 상흔을 무시하고 있는 과거 독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행히도 과거를 외면하지 말고 그대로 기억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똑같이 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목소리들이 구체화된 모습은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독일이 과거를 기억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고 오랜 진통 끝에 반기념비를 만들어 낸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결과물이 꼭 반기념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배를린 시내 중심부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2,711개의 콘크리트 비석으로 이뤄져 있다. 지하에 있는 전시관을 빼고는 어디서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침묵하는 비석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이 조형물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베를린 100번 시내버스가 정차하는 실슈트라세 정류장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설명과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비판이 적혀있다. 버스를 타고내리는 승객들은 자연히 홀로코스트와 아이히만의 악행을 접하게 되고,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를 되새기게 된다.
나치 독일에 의해‘안락사당한’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조형물. 나치 독일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수만명의 △정신 및 지체장애인 △동성애자 △노동 불가능자 등을 학살했다. 이들이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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