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미래로 향해가며 현재의 흔적을 남긴다. 흔적들은 도시에 누적되며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한국의 관문, 부산은 근대기의 격동기를 거치며 다양한 결의 무늬를 이루어왔다. 부산은 바다와 경사지가 만나는 곳, 해양과 대륙이 만나는 경계에 있어, 역동적이다. 역사도 사람들도 그런 편이다. 6·25전쟁 발발 70년을 맞이하며 격동기의 많은 부산의 지문들 중에서 아주 어두운 단층, 피란민의 삶과 주거 공간을 기억해본다.

피란민의 거주와 삶

피란민들은 전쟁이 나자 고향을 떠나 맨몸으로 한반도 끝, 부산까지 밀려왔다. 피란민들은 전쟁 통에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마저 잊게 하는 처참한 상황에서 살 곳이 필요하였다. 피란민 수용소에 들어 갈 수 없었던, 이들은 △언덕 △개천가 △하천변 △다리 밑 △부두 △공터에까지 공간을 스스로 마련하였다. △움막 △천막집 △판잣집 △더부살이 등으로 생존하였다. 피란민이 생각한 피란공간은 곧 전쟁이 끝날 것이니 임시 거처를 주변의 △종이 △깡통 △천막 △가마 △판재 △각목 △루핑 등으로 좁은 땅에 작은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재료가 화재에 취약해 밥을 하다가 불씨가 날아가 지붕에 붙으면 대화재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다. 재해민은 피란지 속의 피란지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먼저 살아남아야 했다. 

피란민은 전국 방방곡곡 살아왔던 농경 유교적인 전통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공간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흙과 나무를 소재로 가구(架構)형식 내에 방과 마루를 칸과 채로 유교적 사회질서를 구성되던 전통적인 생활공간은 근대식 판재로 대체되고 사회적 공간들은 해체되었다. 정부에서 피란 주택으로 제공한 4칸집 평면은 과거의 4칸 홑집이 아니라 전(田)자형이었다. 삶과 공간이 압축되었다. 6·25전쟁으로 근대적 자재와 건축술을 전 국민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우암 피란민촌 소막사와 가마니 텐트(1950)
우암 피란민촌 소막사와 가마니 텐트(1950), 부경역사연구소
남구 피란민 움막집(1952), 부경역사연구소
남구 피란민 움막집(1952), 부경역사연구소

피란민 주거지의 기억과 흔적

이러한 피란 시기의 주택과 기억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현재 피란기의 주거지는 1970년대 이후 고도 경제개발 시기를 거치며 거의 사라졌다. 어려운 과거를 기억하기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이기도 하지만, 잠시 거처를 위해 긴급한 상황에서 내구성이 부족하고 취약한 집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자리 그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시 인구 증가로 도시 확장과 과밀화 과정에서 거의 철거되었다. 짓고 뜯고, 더 크게 짓고 더 크게 파괴하고 또 밀도와 높이를 키워 더 높이 짓고 하다가 부산의 모습은 조화를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주택이 사회적, 물리적 격차를 증폭시키는 하는 도구가 되어 왔다. 피란주택은 경사지 터의 지문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피란마을 중, 먼저 우암동 소막마을이 있다. 1909년 소를 소독하기 위해 만든 검역시설이 있었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인들의 체위향상을 위해 육질이 좋고 온순한 조선의 소가 필요해 검역시설을 만들었다. 여기에 해방 이후 해외 귀환동포가 점유해 살았다. 한국 전쟁기에는 피란민 수용소로 변용되었다. 휴전 이후에도 갈 곳이 없는 피란민은 그대로 남아 소막마을이 되어 있다. 아직도 소막사가 일부 남아있고 그 속에 아직도 피란민이 살고 있다. 피란민은 소막사 일부 공간을 △변용 △증축 △신축해서 48두의 소를 수용하던 약 8.2x50.9m 소막사 한 동에 16가구 내외로 분할되어 △주택 재료 △공간 △기억이 꼴라쥬 복합체로 존재한다. 또 감천문화마을은 태극도 종교인 이주마을이다. 1956년부터 감천동 태극도인의 종교마을을 조성하였다. 아미동 비석마을 역시 일제시기에 일본인의 공동묘지에 피란민이 천막을 짓고 살다가 현재까지 살아왔다. 광복동에는 현존 한국 최고 3층 집합주택 청풍장(1941)과 소화장(1944)이 나란히 있다. 한국전쟁 때 한층 증축해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공존하고 있다. 

부산에는 우암동 소막마을은 소가 살던 곳에 사람이 살게 된 마을이고, 감천문화마을은 혼란기에 휴거를 기다린 종교마을이고, 아미동 비석마을은 죽은 자의 마을이 산 자의 마을이 되어있다. 부산에는 다양한 시공간이 존재하는 헤테로토피아적 공간들이 공존하고 있다. 

우암 소막마을(2016)
우암 소막마을(2016)

부산스런 부산

한국 전쟁 시기에 부산에는 피란민들이 몰려왔고, 항만과 부두, 국제시장 등에 △구호물 △종교계 원조품 △군부대로부터 나오는 생필품과 문화가 들어왔다. 일터와 근거리, 중구, 동구, 서구 등 경사지를 따라 빼곡하게 판잣집이 들어찼다. 피란 온 농경민은 장사를 시작하고 산업을 일으키게 되었다. 과거 향토기업인 동명과 국제그룹 현재의 △삼성 △엘지 △현대 △한화그룹 등이 부산에서 났다. 문화예술계의 인사도 부산을 찾아왔다. △김동리 △이주홍 △이중섭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어두운 별 밤 아래 꿈을 찾아가는 풍경으로 합류되었다. 

피란민들은 낯선 장소에서 한 이방인으로서 과거의 경험들이 해체되며 원주민의 일상은 공간적 관계들 속에서 포개지며 지속되었다. 부산은 재래와 외래 문화가 팔도 사람들과 섞이며 일상이 되었다. 이제 피란민은 자녀 교육과 분가를 시키고, 대한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으로 토박이가 되어왔다. 그 백발 노인들은 격동기의 피란 시절 고생을 아련한 보람으로 기억한다.

최근 부산광역시에서 세계에서도 희귀한 피란 주거지 유산인 피란 수도를 주제로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부산은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는 근대 격동기의 결들을 살려내어야 한다. 기억의 지속은 우리의 정체성을 살리고 도시를 풍요롭게 한다. 피란 수도의 모습도 지혜의 도시 부산으로 합류되기를 희망한다. 모두 21세기 환태평양과 유라시아의 관문도시 부산이 한국 미래로 또 다시 끓어 오르는 ‘가마솥(釜)’이 되기를 기대한다.

유재우(건축학) 교수
유재우(건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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