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자신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는지의 여부는 동물의 인지 능력 수준을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로 활용된다. 사람의 경우에도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보고,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지는 인지 성장 과정에서 보이는 중요한 변화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1990년 2월 14일, 인류 역사상 가장 달콤했던 발렌타인데이가 있던 날이 되어서야 인류는 본질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스스로가 이 광막한 우주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살아가고 있는지를 거울에 비춰 관조해본 적이 없었다. 1977년 지구를 떠나 10년이 넘는 세월을 공허한 여행을 이어간 끝에, 당시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 1호는 해왕성 궤도 너머 진정한 성간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당시 젊은 나이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NASA의 다른 흔한 엔지니어라면 쉽게 하지 못할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당시 칼 세이건은 탐사선이 더 멀리 떨어져 지구와 제대로 된 교신을 주고받기 어려워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카메라 앵글을 뒤로 돌려 태양 곁을 돌고 있는 태양계 행성들의 가족사진을 남겨 보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당시 칼 세이건은 60억km 거리에 떨어진 보이저 1호의 눈을 빌려 바라보게 될 지구의 하찮은 모습이 분명 인류를 새롭게 각성시킬 수 있는 훌륭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여러 설득 끝에 NASA의 엔지니어들은 조심스럽게 보이저 1호의 자세를 제어했고 역사적인 가족사진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사진의 한 켠, 하나의 픽셀보다 더 작은 희미한 얼룩의 모습으로 우리 고향 행성이 담겼다. 

관습적으로 지구는 하나의 살아있는 거대한 우주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구라는 거대한 고립계에 갇혀있다는 슬픈 사실을 내포한다. 최근의 바이러스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그저 막연하게 넓게만 생각했던 지구는 사실 불과 한 달 만에 판데믹에 이를 정도로 연약하고 좁은 세상이었다. 만약 지구 멀리 다른 외계인들이 오늘의 지구를 바라본다면 아마 우리 인류는 지구라는 크루즈선에 갇혀 바이러스 전파로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지구라는 우주선에 격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이러스의 치료제는 우주에서는 찾아오지 않는다. 대책 없이 뜨거워져만 가는 지구의 기온을 식혀줄 냉각제 역시 우주에서 갑자기 툭 떨어지지 않는다. 지구 바깥 다른 존재의 시선을 통해서는, 그들의 조언을 통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먼 미래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은 마치 황량해진 밭을 버리고 또 다른 새로 태울 밭을 찾아 떠나 전전하는 우주의 화전민과 같은 해결 방식이다. 이는 너무나 무책임하고 또 오래 지속할 수 없는 방식이다. 우리는 정녕 더 먼 우주로 나아가야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가? 우주에 어딘가 존재할지 모르는 또 다른 외계 존재를 가정해야만 그들의 눈을 빌려 우리를 돌아봐야만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체감하고 경각심을 가질 수 있을까?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지만, 그 곁을 떠나야만 소중함이 느껴진다는 이 진부한 표현처럼 우리는 여전히 지구를 떠나 멀리서 지구를 돌아볼 때에만 지구 바깥 멀리서 지구를 관조하는 또 다른 존재들의 눈을 빌려야만, 즉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고향 행성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청소년 시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우주가 주는 외부에서의 자극에만 의존해서는 우리의 존엄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더 넓은 우주로 나아가며, 우주의 익숙함에 권태를 느끼고 있지만, 그간 인류가 보낸 모든 탐사선 선미의 불꽃은 모두 지구를 향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웅배(연세대 은하진화연구센터) 연구원
지웅배(연세대 은하진화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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