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하다. 재택수업을 들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말하자면 그렇다. 마음 속 응어리는 쉬이 풀리지 않았고, 결국 일반선택 강의 하나를 삭제했다. 평이 좋아 기대 했던 강의였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문제는 지난 2주간 교수님의 얼굴을 단 한 차례도 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어디 얼굴뿐이겠는가.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 없다. 수업은 타 대학의 강의가 대신했고, 매 시간 과제를 제출해야 했다. 고작 20분 남짓의 강의를 듣고 제출해야 했던 과제는 전문적인 지식만을 요구했다. 과제에 대한 별다른 답변도 없었으니, 필자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더는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았다.

딱히 필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올해 입학한 새내기들은 학교 전경보다 수업 과제를 먼저 접해야만 했다. 그마저도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스스로 공부해 과제를 제출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학교 커뮤니티 사이트에 과제를 물어보는 글이 많았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을까. 대학생이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지만, 새내기가 캠퍼스의 낭만보다 이를 먼저 깨닫는 것은 가혹했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해 보인다. 코로나19로 인해 재택수업을 시작할 것이라 누가 예견할 수 있었을까.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이야 모두 다를 수 있지 않은가. 과제물 활용 수업을 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여지는 없었다. 당초 대학본부의 권고사항에는 수업유형에 대한 내용만 존재했다. 선택은 자유였고, 이에 대한 제한 사항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강의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변명거리가 잘못됐다. 지금의 문제를 만든 것은 코로나19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노력이었다. 과제물 강의도, 타 대학의 강의를 시청하게 한 것도 모두 그들의 선택이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야했다. 매 수업마다 과제물을 제출하게 하더라도 가르치려는 노력은 있어야했다. 타 대학 강의 시청도 최소한 한 번은 자신의 얼굴을 비췄어야 했다. 그것마저도 어려웠다면 학생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변명거리라도 찾아야 했다. 적어도 학생들에게 이해만을 요구하는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존경심은커녕 배우고 싶은 욕구마저 사라지고 만다. 묻고 싶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이 맞느냐고. 물론 어떠한 대답을 들어도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노력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니 대답은 들은 거나 마찬가지다.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과정이고 수단이다. 오래된 역사 속에서 교육은 끝없는 논쟁을 거듭해오며 발전했다.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한 가지. 그것에는 항상 가르침과 배움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삭제했던 강의에서 가르침은 없었다. 그 와중에 강의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공지 내용.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대면강의 보다 더 효율적이다’. 아이러니하다. 가르침은 없었으나 그곳에는 배움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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