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vard Munch  (1885-86)
Edvard Munch (1885-86)

‘나는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당연히 사람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그러나 유럽에 거주하는 아시아인들은 당연하지 못했다. 코로나19가 유럽, 아메리카 대륙까지 퍼지면서, 아시아계 사람들은 바이러스로 여겨졌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이 코로나19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국적은 상관없었다. 중국이 속한 아시아계란 점이 중요했다. 아시아계란 이유로 가게 출입을 거부당하고 거리에서 폭언을 들었다는 제보들이 증가했다.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은 SNS 해시태그로 스스로를 해명해야 했다. 나는 바이러스가 아니라고.

아시아 안에서도 차별이 일어나긴 마찬가지였다. 지난 1월 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중국인 입국 금지 요청’이 올라왔다. 76만 명이 청원에 동참했다. 일부 언론은 ‘우한 폐렴’이란 명칭을 고수해, 코로나19와 중국을 강하게 연결 지었다. 덕분인지 ‘음식점에 중국인을 출입금지해야 한다’, ‘조선족을 중국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바이러스는 출신 국가를 가려 전염되지는 않는다.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이라면 한국인과 건강 조건이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중국인’이란 점이 중요했다.

혐오는 인종 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자국민들도 서로를 혐오했다. 방역에 대한 책임 소재와 함께 개인의 사생활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 예방 차원에서 밝혀진 확진자의 이동 경로는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탓에 확진자들은 병에 걸리는 것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무섭다고 한다. 

질병을 얹은 혐오는 더 원초적으로 나타났다. 바이러스의 대유행 후 유럽에선 심심찮게 아시아인이 혐오범죄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질병에 대한 개인의 두려움은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의 방향이 질병이 아닌 환자, 환자가 속한 집단에 이르는 것은 일견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혐오가 질병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혐오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질병과 사람을 엮어서 혐오하는 걸까.

질병 혐오의 이유

질병을 넘어 사람이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선, 혐오의 근원부터 알아야 했다. 펜실베니아대의 폴 로진(Paul Rozin) 교수는 혐오의 근원을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혐오는 병원체를 피하고자 발달한 감각이다. 사체, 썩은 고기, 배설물 그리고 구더기와 같은 것들은 해로운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를 품고 있다. 이런 원초적 대상들에 대해 혐오 감각을 키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체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폴 로진의 연구로부터 혐오는 병원체를 피하는, 즉 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본능으로 비롯됐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질병’에 한정된다. 본능만으로는 사람까지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를 알려면 사회문화의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ubaum)은 혐오를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 두 갈래로 나누었다. 원초적 혐오는 로진이 밝힌 원초적 대상들에 대한 혐오를 가리킨다.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는 때로 다른 대상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사람 또는 집단을 해롭고 위험한 ‘오염원’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확장된 혐오가 ‘투사적 혐오’이다.

바이러스가 된 사람들

질병에 걸린 환자는 원초적 혐오의 대상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가장 먼저 투사적 혐오의 대상이 됐다. 이를 연결해주는 것은 소위 인과응보 서사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그의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을 일종의 인과응보로 여기는 관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경우 질병은 ‘잘못’에 대한 대가로 이해된다. 비정상적인 상태의 질병은 일종의 벌이었다. 그래서 병의 원인은 신체 문제에서 시작돼 사회적 위치, 인간성을 가늠 짓는 기준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환자의 행동이나 신분 등은 ‘질병에 걸릴 만하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이런 사회적 인식으로 환자들은 이중적 혐오를 겪어야 했다. 질병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본인의 잘못으로 질병을 얻었다는 낙인으로부터였다. 환자가 되면 병과 싸울 준비와 함께 비판받을 준비도 해야 했다. 과학철학자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의 말처럼, ‘환자가 된다는 것은 환자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해롭고, 달갑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평가 절하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코로나19 확진자들도 이중적 혐오를 겪고 있다. 코로나19 환자라는 사실과 함께 무얼 먹고, 어딜 간 모든 것이 질병에 걸린 이유가 되고 손가락질받을 이유가 됐다.

때로 질병은 환자가 아닌, 질병과 무관한 집단을 혐오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대개 이런 집단은 질병으로 문제 삼지 않아도, 혐오의 대상이었다. 질병은 다른 △민족 △인종 △국가 △성별에 대한 혐오를 정당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였다. 유대인들이 페스트를 퍼뜨렸다, 동양인들이 코로나19를 전염시킨다는 종류의 말들이 바로 그것이다. 의학적으로 틀린 사실이란 점은 무관하다.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질병의 근원인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이런 혐오는 진실이 아닌 망상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상 속에서 특정 집단에게 역겨운 속성을 부여하고 그들을 ‘오염원’으로 취급한다.

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이것은 그 집단을 혐오해도 괜찮은지 아닌지의 문제다. 그리고 질병은 이 혐오를 정당화하는 훌륭한 핑계가 된다. 사람들이 질병을 통해 휘두르는 혐오의 칼날은 무차별적이다. 치료하기 어려운 전염병이 돌 때마다 특정 집단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왔다. 중세 유럽 유대인은 페스트를 퍼트린 민족이라며 학살당했다. 19세기 아일랜드 이주노동자들은 콜레라의 감염원이라며 박해받았다. 누스바움은 이런 혐오로부터 사람들이 안정감을 느낀다고도 말했다. ‘공동체의 오물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 불편감을 투사함으로써 지배적인 집단은 자신을 깨끗한 존재라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복되는 비극을 막으려면

질병으로 인한 혐오는 비극을 만든다. 일단 한번 혐오의 대상이 되고 나면 병에 걸린 이들은 더 이상 사회에 복귀할 수 없다. 혐오가 씌우는 낙인이 사회 복귀를 위한 동력을 없애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에이즈 환자는 ‘문란’, ‘호모’라는 단어에 가둬진다. 조현병 환자는 ‘잠재적 범죄자’란 낙인과 싸우고 있다. 이런 낙인은 환자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막고 사회적 죽음을 선고한다. 환자들은 사회에서 쫓거나거나, 제거당하기도 했다.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한센인들은 소록도로 격리됐다. 그곳에서 한센인들은 강제 낙태, 고문 등을 당했다. 나치 독일의 경우 장애인, 정신질환자들을 열등 인간으로 간주해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비극은 쌓이고 쌓여 사회 전체를 짓누른다. 질병으로 인한 무차별적 혐오는 건강한 가치판단을 불가능하게 한다. 질병이 나쁘다는 등식은 매우 편리하지만, 그 판단에 윤리나 도덕이 끼어들 구석은 없다. 잘못한 것도 없고, 불행해야 할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 병에 걸렸단 이유만으로 지탄받는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질병과 관련없는 집단도 싸잡아 비판하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캉길렘은 “정말 중요한 것은 질병과 죄를, 질병과 악마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질병’을 묻는다

다시 처음의 질문을 묻는다. 왜 사람들은 질병과 사람을 엮어서 혐오하는가. 답은 단순하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타인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다른 질문도 던져야 한다. 이런 혐오의 이유가 정당해 보이는가. 이 답도 단순하다. 아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혐오가 되고, 이 혐오가 만드는 차별과 배제는 질병을 밀어내는 데 도움 되지 않는다. 환자의 측면에선 진단과 치료를 어렵게 하고, 질병과 무관한 사람들에겐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사회 전면에 드러난 질병과 혐오의 고리를 그대로 놔 둘 것인가. 전염병이 무서우면 철저한 검역·방역 체계를 세우면 된다. 과학적 근거에 뒷받침 된 예방법, 치료법을 지킬 수 있는 시민의식을 갖추면 된다. 질병은 공포도, 누군가를 깎아내릴 이유도 아니다. 그저 치료해야 할 대상일 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답도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은가?

※참고자료

1. 최성민. (2020). 질병의 낭만과 공포 -은유로서의 질병-. 문학치료연구, 54(0), 315-344.
2. <은유로서의 질병> 수전 손택 저/이후/2002
3. <질병, 영원한 추상성> 최은주 저/은행나무/2014
4. <감염병과 인문학> 정과리, 이일학 외 저/강/2014
5. <혐오에서 인류애로> 마사 C. 누스바움 저/뿌리와이파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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