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났다. 넉터에는 존재만으로 쓰임을 다한 정책집이 있고, 선본의 조바심을 보여주듯 벽과 바닥에는 포스터가 줄줄이 붙어있다. 땅에 박제된 포스터나 정책집처럼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기구가 있다. 냉철한 판단과 결정의 진중함은 온데간데없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연거푸 그른 판단과 해석, 회칙 위반을 아랑곳 않고 일삼는다. 이들은 두 단위에만 해당 되는 연장 투표를 모든 단위에 적용했고, 1~2% 차이로 투표 당락이 결정되지 않는다고 운운한다. 이들만의 ‘잔치’를 보고 있으니 ‘중앙선거관리위원’이라는 껍데기도 버거워 보인다. 연장투표 외에도 6개의 이의 제기가 순식간에 기각됐고, 그 이유를 듣고 있잖니 씁쓸하고 답답한 마음만 커진다.
지켜야 하는 것을 모조리 잃을 만큼 침묵의 결과는 무겁다. 요컨대 우리 학교서 침묵을 특권으로 여기며 시시하는 자들이 있다. 어리석은 침묵이 낳는 결과를 모르는 중앙운영위원회는 중선관위원을 해임할 권한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중선관위원을 해임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중운위원이 곧 중선관위원이기 때문이다. 본인을 해임해야 한다니, 해괴할 따름이다. 이러한 탓에 해임 논의는 없었고, 상시 기구인 중앙운영위원회는 지난 3주간 침묵하며 열리지 않고 있다. 차라리 이 사태에서는 중운위원의 지독한 무지와 캄캄한 안목이 되레 나을 뻔하다. 이제 대학 사회를 위해 힘쓰는 중앙운영위원회까지 개혁의 단상이 돼야 하는가. 대학사회에서부터 본인 감싸기 적폐가 일삼아지는 것이 정녕 학생 기구인가.
과연 중선관위원이자 중운위원이 본인들의 과오를 모를까. 이들을 감시하는 기구가 없기에 그들의 태만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국가는 헌법에 따라 공정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선관위를 둔다. 이 기구에는 감사관이 있으며, 선거관리위원회와 소속 기관에 대해 감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중선관위와 중운위원들의 결정을 감시할 기구가 없다. 시급한 사안들에 대해 결정할 권한이 동일한 위원이 속한 중선관위와 중운위원으로부터 나오기에 선거기간에 서로를 견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선거시행세칙 해임 조항을 보면 중선관위원으로서 언행이나 품위를 훼손한 자는 해임한다고 돼 있으나, 이를 감시하거나 지적할 감사원이 없기도 하다. 세칙이나 회칙에 따라 활동하는지는 모두 중선관위와 중운위원들의 ‘양심’에만 맡겨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발행이다. 씁쓸하다거나, 개운하다 등 한 단어로 함축하기 까다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3여 년간 그나마 괜찮은 무언가를 위해 치열하게 고뇌해 깨우친 바가 있다면, 모든 일은 순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순리를 거스르는 요란한 변화나 개혁은 모든 일을 그르친다. 하지만 새삼스레 예외도 있어야 한다고 읊조려본다. 우리 학교 총학생회와 그 산하 기구에는 차디찬 개혁의 바람이 불어도 좋을 따름이라고 끄적인다. 단언하지만, 이 기구는 절로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가망이 없다. 조직에 대한 ‘회피’가 현명한 건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편집국장으로서 쓰는 마지막 칼럼이다. 소재가 이러해 독자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