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시선 평행이론
진실은 하나, 승리자는 둘?
  • 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 승인 2019.12.07 23:19
  • 호수 1595
  • 댓글 0

 

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 교수

‘지소미아’, 한일정보보호협정의 종료 유예를 둘러싸고 한일 간에 목소리가 엇갈린다. 일본에서는 “우리는 아무 양보도 안 했다”, “퍼펙트하게 이겼다”라는 말이 나오며, 한국에서는 “양심이 있는가”, “일본이 사과해서 잠시 유예해주었을 뿐 우리의 판정승”이라 받아치고 있다. 어쨌든 벌어진 사실은 하나일 텐데 두 당사국이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함께 맺은 국제관계를 놓고 서로 다르게 주장하는 일이 역사상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처럼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상대의 발언이 곧바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는 더욱 심했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중동의 패권을 놓고 카데시에서 히타이트와 충돌했다. 그 결과는 무승부였는데, 굳이 보자면 이집트의 패배에 조금 더 가까웠다. 그러나 이집트로 돌아온 람세스는‘자신의 위대하고 완벽한 승리’였다고 요란하게 사람들에게 선전을 했다. 그 뒤 히타이트와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이라는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을 맺을 때도, 이집트 쪽에 남게 될 조약문에는 마치 위대한 람세스가 히타이트의 애걸을 받아들여 관대하게 평화를 베풀어준 듯한 글귀를 집어넣었다.

1004년 송나라와 요나라가 맺은‘전연의 맹약’에서도 이런 아전인수는 나타났다. 당시 두 나라는 형제국이 된다는 데 합의했고, 송나라가 형, 요나라가 아우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송나라에서는‘요나라의 임금이 우리 황제를 형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반면, 요나라에서는‘송나라 임금이 우리 황태후를 어머니로 받들기로 했다’고 선전했다. 두 황제가 형제가 되는 이상 요나라 황제의 어머니는 송나라 황제의 어머니도 되는 셈이니 그런 궤변이 가능했던 것이다.

1898년‘파쇼다 사건’도 이러한 상황과 비슷하다. 당시 프랑스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아프리카를 먹어 들어간다는 횡단 정책을 쓰고 있었고, 영국은 북부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진출한다는 종단 정책을 쓰고 있었다. 두 개의 화살표는 수단 남부의 파쇼다에서 충돌했다. 자칫하면 2대 열강의 전쟁이 벌어질 국면이었으나, 타협이 이뤄짐으로써 다행히 싸움 없이 끝났다. 그런데 이는 사실상 프랑스의 패배였다. 이후 프랑스는 수단을 넘어서 동쪽으로 뻗어 나가지 못한 반면, 영국은 당초 예정대로 쭉쭉 남하해 남아프리카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당시 프랑스 정부와 언론은 이를‘위대한 승리’로 치켜세웠고, 파쇼다에서 돌아온 프랑스 군인들은‘영웅’으로 대접받았다.‘정신승리’의 전형이랄까.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가장 뼈아팠던 정신승리 사건은 1876년에 있었다. 당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무력으로 조선을 위협했던 국가, 일본은 마침내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 개항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 ‘굴욕적 조약’을 맺고 돌아온 신헌 등의 대표들을 조선 조정은 마냥 칭찬하고 치하했다. 그 이유는 애초에 일본과의 개항 교섭이 자꾸만 결렬되었던 것이 천황국임을 표방하는 일본이 외교문서에 ‘황(皇)’,‘칙(勅)’ 같은 글자를 쓴다는 데 있었는데, 강화도 조약문에는 이러한 글자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반면 일본은 생각지도 않았던 전리품, 즉 치외법권이나 해안 측량권은 물론이고 무관세 무역 인정 등을 조선에게서 따내고 춤이라도 출 분위기였다. 우리는 실익은 있는 대로 빼앗기고 알량한 명분에 기꺼워했던 것이다. 

‘하나뿐인 진실’이지만 되도록이면 우리 당국 쪽에 유리하게 해석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사회의 외교에서 유리한 해석과 같은 것들을 허용하면 안 되는 까닭이 있다. 그것이 작게는 당장의 손익계산을 어렵게 하여 국민의 눈을 속이는 행위가 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고, 크게는 장차의 국제분쟁의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press@pusan.ac.kr

<저작권자 © 부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