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 나폴레옹의 휘하에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투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지역구는 하나둘 쓰러졌고 곳곳에서 항복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스페인 내전으로 국왕 카를로스 4세는 왕관을 내려놓았고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즉위했다. 죄어오는 프랑스의 압박에 페르난도 7세도 타국으로의 도피를 선택하고 남은 시민들끼리 의회를 결성했다. 1810년 9월 24일 스페인의 최초 자유주의 의회가 카디스에서 열렸다.   

스페인은 프랑스와 대립해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약 7년간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스페인에는 3가지의 통치 형태가 작동하고 있었다. △전쟁 전부터 존재하던 기관 △프랑스에 의해 세워진 국가기구 △외세에 맞서 새롭게 설치된 권력 기구로 이뤄졌다. 최고 중앙위원회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국민주권과 인민 의지를 중시하는 듯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와 같은 이념이 지켜지지 않았다. 중앙위원회의 한계점이 드러나면서 자유주의자들은 의회 설립과 성문헌법 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프랑스에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은 지역의원을 선출했고 자유주의와 절대주의 성향의 의원들로 의회가 꾸려진다. 전쟁이 한창 발발하던 1810년 9월 24일, 스페인 최초의 근대 자유주의 의회가 카디스에서 개최됐다. 

주권이 의회에 있으며 의회는 국민을 대표한다는 것을 의회의 개원식에서 선언했다. 또한 페르난도 7세의 퇴위는 무효이며 스페인 국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의회는 1810년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레온 섬에서 활동했으나 프랑스군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카디스로 장소를 옮겼다. 카디스는 부르주아 계층이 탄탄하고 사상적으로 개방적인 도시였다. 이후 카디스 의회는 헌법 제정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1812년 3월 19일, 스페인의 자유주의 이념을 담은 카디스 헌법이 선포되었다. 총 10장 384조로 구성된 카디스 헌법에는 국민주권과 삼권 분립, 의원의 대표권을 명시했다. 이는 스페인 최초로 국민주권을 보장하는 민주적인 헌법이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지속되지 않았다. 독립 전쟁이 종결되며 스페인 국민들은 독립을 맞았고  다른 나라로 피신했던 국왕 페르난도 7세는 귀국했다. 카디스 의회는 국왕에게 헌법에 대한 서약을 요청했으나, 페르난도 7세는 의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카디스 헌법을 무효화했다. 절대왕정을 고수한 국왕은 의회의 주요 서류를 불태우고 종교 재판소를 부활시키며 폭정과 억압 정치를 시작했다. 페르난도 7세가 통치권을 완고히 하는 동안 자유주의자들도 부활을 꿈꿨다. 1814년부터 1820년까지 비밀로 결사 단체를 조직하며 왕정체제에 저항했다. 바스크, 카탈누랴, 나바라의 군대가 반기를 들었으나 모두 진압됐다. 이후 1820년 라파엘 데 리에고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또 다시 진압됐다. 이는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됐고 페르난도 7세는 카디스 헌법을 인정하며 스페인은 자유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카디스 헌법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중남미국가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권미란(부산외대 스페인어) 교수는 “카디스 헌법은 스페인의 시민의식이 진보적인 성향을 띠는 데 영향을 미쳤다”라며 “이뿐만 아니라 중남미국가의 독립을 재촉하고 19세기 내내 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핵심이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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