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 교수

“대통령을 보자마자 많이 늙으신 것 같아 눈물이 났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을 돈 지 열흘 만인 2019년 11월 19일 MBC 특집 <국민이 묻는다-2019 국민과의 대화>에서 한 시민이 대통령에게 한 말이다. 이에 대해 ‘맹목적인 광신도’라는 험한 말도 나왔지만, 이게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작동방식에 대한 비밀이 이 시민의 눈물 어린 말 한마디에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게 옳겠다.

“한국 사회가 수평적 조정 능력은 부재하고, 수직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위계적 사고가 강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방송을 지켜본 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검찰개혁이나 남북관계 등에 대해 대통령에게 따져 묻는 질문도 있었지만, 각자 해결 못 한 민원들을 하소연한 경우가 꽤 보였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소개한 <한겨레> 이완 정치팀 기자는 “대통령을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왕조시대 군주처럼 보는 시각이 여전하다는 얘기”라고 진단한다.

그렇다. 그게 바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 이완 기자는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정치 부재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지만, ‘정치 부재’라는 말은 너무 점잖다. 대다수 국민에게 정치는 속된 말로 ‘개판’으로 인식된다. 대통령만이 희망이다! “대통령을 보자마자 많이 늙으신 것 같아 눈물이 났습니다”라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을 보는 그런 시각이나 자세가 바람직하냐 하는 건 별도로 따져볼 문제지만, 중요한 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그런 시각이나 자세를 가진 사람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한국은 ‘정당 민주주의’국가인가?아니다. ‘지도자 민주주의’ 국가다. 지도자 민주주의 체제에선 지도자가 만기친람(萬機親覽: 모든 일을 샅샅이 보살핌)하는 가운데 지도자를 모시는 청와대가 정부·여당을 지배한다. 그런 ‘청와대 정부’로 성공적인 국정운영만 잘 해낸다면 문제 될 게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을 견제하고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대 모든 정부에서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던 여당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지도자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왜 여당은 그 이전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도자는 사람이지만, 정당은 조직이기 때문이다. 지지자들의 열정과 숭배는 사람을 향할 뿐 조직을 향하는 법은 없다. 정당이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국회의원들은 그런 열정과 숭배에 숨죽여 지내다가 지도자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는 임기 말엔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서라도 비로소 왕성한 비판에 나서게 된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한 사람이 감당해낼 수 없는 일과 책임과 압박을 주고 있다. 그를 마모시키고 탈진 시켜 먹어 치우는 셈이다. 우리가 그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그를 파괴하는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말이다. 

미국에 비해 인물 숭배 현상이 강한 한국에선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 임기 초기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동안 80%대 중반까지 치솟을 정도로 높았다. 이런 높은 지지율이 취임 100일까지 이어지자 지지자들은 열광하면서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외쳐댔으며, 당황한 보수 언론은 “지지율 독재로 가고 있다”라고 한탄할 뿐이었다.

지도자에 대한 과도한 열광은 결코 반길 일이 아니다. 그건 순식간에 과도한 비난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가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의 현장에서 수평적 조정·해결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을 우리 모두의 과제로 삼지 않는 한 대통령 1인에게 ‘감당해낼 수 없는 일과 책임과 압박’을 주면서 열광하거나 비난하는 악순환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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