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감독 김보라 | 2019)

항상 함께한다고 여겨지는 가족부터 친구, 직장상사,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인간은 타인과 항상 접촉하고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받기도, 위로받기도 한다. 필자 또한 타인과 상처와 위로를 주고받은 기억이 셀 수 없이 많다. 타인과의 마찰은 언제나 겪는 어려움이지만, 그때마다 힘들고 아프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해답을 제시해준다.

중학생 김은희(박지후 분)는 가족 간 사이가 좋지 않은 이른바 ‘콩가루’ 집안에서 살고 있다. 외도를 일삼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폭력적인 오빠, 불량 청소년인 언니와 함께 지낸다. 은희는 자신의 가족이 싫지만, 자립 능력이 없어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학교에도 마음 맞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러한 은희에게 새로 온 한문 선생님인 김영지(김새벽 분)는 한없이 빛나는 존재다. 영지는 은희에게 뻔한 위로의 말을 하는 대신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제시해주거나 구체적인 조언을 던져주지 않는다. 대신 영지는 자신이 생각하는 ‘삶’에 대해 얘기한다. 늘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속에서 나쁜 일과 좋은 일을 모두 겪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은희는 나쁜 일 속에서 숨구멍을 트느라 허둥대지만, 그 너머에는 좋은 일도 분명 있다는 위로의 메시지를 속삭인다. 영지에게 위로받은 은희는 인생에서 나쁜 일은 필연임을 깨닫고 살아가게 된다.

이 영화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휘둘리는 삶은 지양하라고 은희를 통해 말한다. 은희는 삶을 위로해주는 영지에게 전적으로 기댄다. 책과 떡을 선물하고, 여러 번 영지를 찾아가 위로를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의존이 심해지고 영지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은희가 영지에게 완전히 기댔을 즈음, 불운의 사고로 은희는 영지를 잃는다. 갑작스런 영지의 죽음은 은희의 삶에 일어난 또 다른 ‘나쁜 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희는 절망에 빠지지 않고 천천히 타인을 돌아본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야만 함을 받아들이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 다짐한다. 지나갈 일이니 고통스러워 말고 삶을 이어나갈 용기를 얻은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영지에게 의존하며 행복해하는 은희가 아닌, 영지의 위로를 디딤돌 삼아 관계의 염증을 떨치고 나아가는 은희를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쉼 없이 관계를 형성한다. 정보화 사회에 다다르며 소셜 미디어나 디지털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많은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관계가 단절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도 타인과의 관계는 피할 수 없음을 담담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과 감정 소모를 덜 필요가 있다는 따뜻한 조언을 해준다. 영화가 시사하는 바처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반복되는 것이 인간관계다. 쉴 새 없는 관계와 갈등 속에 사는 현대인일수록, 흔들리지 않는 심지처럼 자신을 굳건히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어쩌다 생긴 마찰에 휘둘리지 말고 떨치고 일어나 그 너머를 바라보자. 아마도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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