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지구본을 돌려보며
남아공의 인종차별 고리를 끊다
  • 이지수 기자
  • 승인 2019.11.30 19:18
  • 호수 1594
  • 댓글 0

‘배우려고 학교에 들어와, 하인이 되어 나간다!’ 어린 학생들이 소웨토의 길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신이여 아프리카를 보호하소서’라는 노래를 제창하자 경찰들이 무리 지어 나타난다. 경찰은 검은 권총을 들고 수십 차례의 연발 사격을 가한다. 학생들이 하나둘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13살이었던 헥터 피터슨(Hector Pieterson)의 가슴에 총알이 박힌다. 그의 형이 피터를 안고 울부짖으며 달려 나간다.  

195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은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정책으로 채택했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구분 지어 흑인과 백인의 결혼 금지는 물론, 인종에 따라 거주지를 결정했다. 소웨토는 거주지 정책으로 생긴 흑인 최다 마을이었다. 1970년대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전기와 수도 공급을 받지 못한 채 삶을 영위했고 절반 이상이 일자리를 갖지 못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소웨토의 학생들은 배움을 통해 희망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1976년, 정부는 모든 중·고등학교 수업을 아프리칸스어로만 진행하도록 했다. 아프리칸스어는 백인만이 쓰는 언어였으며 소웨토에는 이를 가르칠 교사와 교재가 없었다. 이 정책은 아파르트헤이트를 공고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소웨토 올랜도웨스토 학교 학생들은 분노를 표하며 등교를 거부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아프리칸스어에 반대하는 운동은 소웨토의 다른 학교까지 확산됐고 6월 16일 소웨토 봉기가 발발했다.

일반적인 학생운동과 달리 소웨토 봉기는 평화적인 양상을 띠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행진을 진행했으나 경찰은 이들을 최루탄으로 진압했다. 이에 학생들이 돌을 던졌고 경찰들은 실탄 사격으로 대응했다. 경찰의 무차별적 사격에 운동 참여자였던 13살의 헥터 피터슨이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소웨토 전체로 퍼져나가 대부분의 흑인이 봉기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경찰은 소웨토 봉기를 제압하고자 수천 명의 인력을 추가적으로 투입했고 결과적으로 4,000명 이상이 상처를 입고 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소웨토 봉기를 계기로 남아공 내에서도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운동선수들은 남아공과의 경기 출전을 거부했고 주위 국가들은 불매운동을 벌여 남아공의 수출에 영향을 끼쳤다. 소웨토 봉기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의 촉매제가 됐고 1994년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지게 된다. 소웨토 봉기가 일어난 6월 16일은 남아공 국가 공휴일인 청년의 날(Youth Day)로 지정됐다.

전문가들은 소웨토 봉기가 남아공의 민주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오준호 작가는 책 <반란의 세계사>에서 소웨토 봉기에 대해 ‘인간다운 교육을 받고 싶다는 요구에서 출발한 투쟁이었다’라며 ‘남아공이 무지개 나라로 가는 시작점이었다’라고 평했다. 

 

이지수 기자  jisooandlog@pusan.ac.kr

<저작권자 © 부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지수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