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나 (신문방송학 19)

필자는 ‘애살 많은 학생’으로 불렸다. 주어진 일을 무엇이든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서 해내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만족하는 결과도 따라왔기에 완벽함에 대한 욕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신문사에 들어오게 된 동기도 마찬가지다. 20살에 시작한 대학 생활을 최선을 다해, 완벽하게 보내고 싶어 기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기자라는 감투를 쓴 완벽주의자라고 평가받고 싶었다. 그렇기에 “<부대신문> 정두나 기자입니다”라고 전화기에 대고 말을 뱉을 때나 명함을 건넬 때마다 만족감에 가득 찼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은 욕심을 채우기에는 모자랐다. 신문에 해박하다고 자부한 것과 신문을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 것이 산산조각났다. 직접 만든 기획과 고정란이 통과되지 못할 때나 기사의 많은 부분을 수정해야 할 때마다 자존감이 추락했다. 신문사 생활은 정해진 틀에 따라 뻔한 내용으로 구성하면 칭찬받던 학창 시절과 천지 차이였다. 자만했던 자신이 겸연쩍었다. 또한 다양한 기사를 한 주에 모두 작성해야 해 ‘욕심대로’, ‘완벽하게’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체감했다. 결국 신문사 생활이 길어질수록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는 시간이 늘었고, 매너리즘에 빠져 기자 생활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버릴 수 없어 성의 없는 태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언제든 완벽한 사람으로 평가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해답을 알고 있다. 아등바등 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주면 된다. 기사를 완벽하게 쓰기에는 역량이 부족해 만족하는 대로 기자 생활을 해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몇 가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완벽하게 일을 해내기 위해선 포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포기할 용기가 없다. 포기한다는 건 능력의 모자람을 직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직 인정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견딜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신문사 생활은 ‘포기’가 아닌 ‘선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포기의 부끄러움을 토로하는 필자에게 신문사 선배가 해준 “포기가 아니라, 다른 것들을 해내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거야”라는 조언 덕분이었다. 말장난 같은 이 말이 포기의 수치를 도려냈다. 포기라는 단어가 주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면, 선택이란 단어로 타협하는 돌파구를 얻게 된 것이다. 결국 포기를 정면으로 마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포기를 마주하기 위한 첫걸음은 내디뎠다. 드디어 선택이란 이름의 포기를 할 자신이 피어올랐다.

신문사 생활이 항상 포기를 저울질해야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는 그 무엇도 놓아주지 않은 채 기자 일을 해내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렇기에 홀연히 놓아줄 수 있는 연습을 시작하려 한다. 포기 없는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쉼 없이 선택하고 또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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